닥터콜의 미소년 미소녀 탐구생활

 

오드리헵번 하면 누구나 공통분모로 떠올리는 영화가 있을 것이다. 제일 처음으로 로마의 휴일이 생각나겠지. 그리고 의외로 허스키 보이스의 문리버가 아름다웠던 티파니에서 아침을, 사브리나, 파계... 그리고 또 어떤 작품이 있을까? 하지만 그 많은 리스트 가운데서도 아마 이 영화의 이름을 떠올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아이의 시간. 혹은 아이들의 시간이라고 부르는 희곡을 바탕으로 만든 흑백 영화. 심지어 이 작품이 지금까지도 여전한 금기 목록 중 하나인 '동성애'를 다루었다는 이야기를 한다면 더욱 놀라게 될지도. 오드리헵번이 동성애 영화에 출연했다?! 하지만 이 요란스러운 호들갑에 비하여 영화는 상당히 조심스럽고 목가적이다.

 

 

아이들의 시간이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 어떤 이미지가 연상되시는가? 고요하고 따뜻하며 서정적이고 순수한 감성이 가슴에 메아리칠 것이다. 사실 필자는 희곡에 관심이 있었던 어린 시절 어느 사전에서 이런 제목의 희곡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제목만 듣고선 얼핏 감성적이고 따뜻한 동심을 담아낸 사랑스러운 시골 영화가 아닐까라고 추측했었다. 그랬으니 희곡을 바탕으로 구성된 이 영화의 상반된 메시지를 놓고 내가 받은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분명히 '아이들의 시간'을 다룬 이야기이긴 하지만 우리가 상상하듯 아이들의 순수한 동심이 아름답게 그려지는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게 악을 지향할 수도 있다.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아이들의 동심은 잔혹성과 폭력성이다. 그들은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아무렇지 않게 남을 괴롭히고 따돌릴 수 있다. 실제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시작되는 집단 따돌림은 어린 시절부터 학습된 감성이니까.

 

 

 

베스트프렌드 카렌과 마사. 17살에 처음 만나 대학까지 함께 졸업한 좀 유별난 친구 사이. 여자 어린이들 전용의 사립 기숙학교를 함께 운영하던 두 사람의 사이에 언젠가부터 잦은 마찰이 생겼다. 그 계기는 카렌이 남자친구 닥터 조와의 결혼 예정을 앞두면서부터다. 영화는 초반 내연하는 듯한 마사와 닥터 조의 관계를 보여주며 마치 두 여자의 갈등이 몰래 조를 짝사랑하는 마사의 마음에서 비롯된 시기심처럼 표현된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행동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폭력적이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즐겨하는 원생 메리의 한마디는 두 사람을 극단적 상황으로 밀어 넣는 도화선이 되어버렸다.

 

 

 

바로 오래전부터 마사의 마음에는 카렌이 들어있었고 그것이 질투를 불러 카렌의 연인 조를 시기하게 만들었다고. 심지어 은밀한 스킨십까지 나누었다는 아이의 귓속말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학부모들 사이에 퍼진다. 하루아침에 학교의 문을 닫게 될 지경에 놓인 카렌은 영문을 알 길이 없어 당황하고 아이를 데려가면서도 쉬쉬하던 이들에게서 겨우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게 된다. 그들을 둘러싼 이상한 소문이 퍼지고 있으며 그 루머의 근원지는 메리의 할머니이자 닥터 조의 사촌인 벨포트 부인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마사는 길길이 날뛰며 당신을 명예훼손죄로 고소하겠노라고 격분하지만 벨포트 부인은 차분하게 경고한다. "오. 제발 그러지 말아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들을 위해서." 벨포트 부인의 경고대로 그녀들은 부인을 고소했지만 재판에서 졌으며 신문 기사는 이 사건을 크게 실었다. 공공연한 레즈비언 커플이 된 마사와 카렌의 곁을 지키는 것은 조의 연정과 진실을 관통하는 두 사람의 관계뿐이었다.

 

 

 

영화의 포스터 중 하나를 살펴보면 오드리 헵번과 셜리 맥클레인의 얼굴 뒤로 "Different..."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오는데 이 문구가 상징하는 것만큼 60년대 초반의 미국 사회가 얼마나 동성애를 터부시하고 있었는가를 드러내고 있다. 실제 미국 사회는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으로 보수적이며 차별적이지만 어쨌든 드러나는 모습은 성소수자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문화로 비추어지고 있으니 동성애라는 말을 입에 떠올리지조차 못하는 이 영화의 조심성은 참으로 이색적이다. 동성애 소재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이 영화에서는 "동성애"라거나 "레즈비언" 혹은 "게이"등과 같은 성소수자를 직접적으로 지칭하는 단어는 단 한마디도 등장하지 않는다. 허풍쟁이 마사의 숙모가 되는대로 지껄인 폭언을 새겨듣고 그녀들을 심상치 않은 관계로 정의 내린 아이들의 입에서는 카렌을 향한 마사의 마음을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정의내린다.

 

-모르타 선생의 말로는 카렌 선생의 태도는 부자연스러운 거래

-부자연스럽다가 뭐야?

-부자연스럽다. 자연스럽지 않다는 말 아닐까?

 

이 말이 상징하는 의미는 크다. 마사와 카렌의 관계는 다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지 않은 행동이고 그것은 곧 금기시된 죄악으로 풀이된다. 실제 마사와 카렌의 재판이 알려지면서 두 사람의 관계가 레즈비언 커플로 공식화되자 사람들은 마치 연쇄살인범이라도 대하는 것처럼 그들을 슬금슬금 피하고 멸시하기 시작하는데 어느 심부름꾼이 두 사람의 집에 물건을 배달하러 와서는 조소 가득한 얼굴로 뒷걸음질치며 그녀들을 놀리듯 바라보는 장면은 충격적이리만치 섬뜩하고 잔혹한 폭력으로 느껴졌다.

 

 

 

영화 속에서 동성애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못할 만큼 험악한 당시 사회 구조의 관습에 따라 이 영화에서도 성소수자들의 인권을 위한 힘 있는 메시지를 던져주지는 못하지만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 슬픈 친구 마사를 추모하는 카렌의 당당한 발걸음은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것이었다. 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녀를 죄인 취급했던 사람들이 폐쇄된 프레임에 갇혀 경외하는 눈으로 카렌을 바라보고 수치심과 두려움으로 집 밖을 나서지도 못했던 죄인 아닌 죄인 카렌이 이제는 그들 사이를 뚫고 지나가며 피해자와 희생자가 바뀌는 순간은 비록 작은 목소리지만 성소수자를 위해 목소리를 내어주는 영화의 진짜 클라이막스다.

 

덧. 감독이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나는 한편으로는 이 '다르다는 것'의 상징적인 의미가 카렌과 마사의 동성애 감정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소악마처럼 엇나가는 행동을 하는 메리를 다소 차별적인 시선으로 바라봤던 카렌의 태도 또한 포함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분명히 메리는 성악설을 믿고 싶을 만치 주먹을 부르짖게 하는 나쁜 아이였지만 아직 성인으로 성장하지 않은 미성숙한 단계의 메리를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경멸하는 시선으로 훈육하는 마사와 카렌의 태도 또한 또 하나의 차별로 느껴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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