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콜의 미소년 미소녀 탐구생활

소박한영화 +53

 

신의 가호는 때론 잔혹하리만큼 무계획적이다. 난파된 배의 구명보트는 항상 그렇듯 좌석 수가 제한되어 있다. 몇 사람 올라타지도 못하는 구명보트를 절망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배 위의 사람들에겐 그들이 신의 가호를 받은 행운아로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그들은 신의 가호를 받은 것일까. 문명과 룰이 개입하지 못하는 망망대해 위의 인간들. 그리고 엄습해오는 굶주림과 목마름. 순간 두 편으로 갈리는 이성과 본능의 혼란. 나는 고민한다. 내 옆의 사람을 먹을 것인가. 먹지 않을 것인가. 혹은 먹는다면 그것은 살인인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나.

 

 

 

파이의 엄마와 파이는 누구보다도 이런 난감한 상황에 놓여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세 명의 신을 믿었으며 그의 어떤 종교는 고기를 탐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파이의 어머니는 채식주의자였고 굶주리면서도 미트 소스를 먹지 못했다. 그녀와 주방장은 고기를 먹는가 먹지 않는가의 이유로 시작부터 신경전을 벌였다. 주방장은 굶으면서까지 신념을 지키는 파이와 파이의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고기 소스를 강요했고 파이의 모친은 그것을 거부했다. 역시 종교적인 이유로 고기를 먹지 못하는 불교 신자는 그들에게 다가와 다정한 목소리로 말한다. "저는 행복한 불교 신자인데 고기 소스를 먹죠. 배 안에서 이건 고기 소스가 아니에요. 양념 같은 거죠." 라고. 아버지의 동물원에서 키워져 심지어 고기조차 먹지 못하는 파이는 세 명의 신을 믿으면서도 그들의 합리적인 가호를 받지 못했다. 파이는 망망대해 위에 남겨진 브룩스였고 결국 더들리가 되었다.

 

 

 

형의 권고로 성당의 성수를 뜨러 간 파이를 향해 신부는 말한다. "너 목이 마르구나?" 그것은 곧 리차드 파커의 원래 이름인 목마름을 파이 또한 공유하고 있음을 내포하는 상징적 은유라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이는 벵골 호랑이 리차드 파커와 마음이 통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피가 흐르는 고기를 쥐고 철장 안으로 손을 내밀어 리차드 파커를 시험했다. 기겁한 아버지에게 파이는 외쳤다. 호랑이의 눈에서 교감을 느꼈다고. 하지만 아버지는 그것은 그저 호랑이의 눈에 비친 네 모습을 본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파이는 리차드 파커를 위해 미안하다고 눈물 흘리며 청새치를 죽였지만 그것을 시킨 것은 벵골 호랑이 리차드 파커가 아닌 파이의 본능 그 자신이었다. 어둠의 바다를 바라보는 리차드 파커에게 파이는 묻는다. 무엇을 보고 있니. 리차드 파커.

 

소아마비의 고통으로 신을 부르짖었던 파이의 아버지는 그의 다리를 낫게 했던 것은 양학 의사지 신이 아니었다고 단언한다. 그래서 그는 파이에게 '이성'을 지키라고 권고했다. 파이의 어머니는 파이의 아버지를 선택했다는 이유로 가족에게 버려졌다. 버려진 그녀에게 가족과 연결된 유일한 뿌리는 '믿음'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어린 날의 파이에게 입안에 우주가 들어있다던 크리슈나 신을 소개한다. 파이가 선택한 좋은 이야기는 두 번째 이야기였다. 그는 아버지가 선물한 프랑스의 가장 맑은 수영장이라던 피싱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크리슈나의 입속과 같은, 그리고 우주와 같은 무한대의 가능성을 자신에게 선물했다. 그것이 '파이'다. 그리고 파이 이야기다.

 

 

 

 

결국 확장성에 대한 이야기다. 어린 날의 파이에게 어머니가 읽어준 신 크리슈나의 입속에 담긴 우주와 같이. 아버지에게 받은, 시작과 끝이 존재하는 수영장의 이름을 버리고 스스로 선택한 무한대의 파이처럼.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전달하는 메시지는 결국 우주의 그것과도 같다. 유한하지 않은 무한대의 이야기.

 

 

 

"사실 소년에겐 빨리 어른이 되고 싶으면서도 영원히 자라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으며, 누군가 자신을 돌봐줬으면 하는 생각도 있다. 그러다가 그걸 벗어나게 되는 순간, 가슴이 아프게 된다." -이안 감독의 인터뷰 중에서

 

 

 

문득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 '가재 바위 등대'가 생각난다. 배를 탄 손님들이 돌아가며 그들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이야기의 말미에는 꼭 "이거 실화예요?" "진짜 있었던 일이에요?" 라는 질문이 따라붙었다. 그러나 어느 이야기가 끝나고 누군가는 외친다. "이 이야기는 진짜인지 가짜인지가 중요하지 않아. 이야기 자체만으로도 훌륭하니까." 라이프 오브 파이의 어느 것이 진짜인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어떤 이야기를 믿느냐에 따라 관객의 감상 또한 달라질 테니까. 그 나머지를 채우는 것은 감독도 원작 소설도 아닌 관객 자신의 믿음이다. 하지만 그것이 종교적 철학이든. 이성과 본능을 재판하는 살아남은 자의 심판이든. 인간과 동물의 상생을 담은 동화의 한 페이지든 간에. 무엇을 느끼건 그만큼의 감동을 채울 수 있는 훌륭한 이야기임에는 틀림없다. 소설 속이든 실화 속이든 리차드 파커의 영혼이 이 영화 속 리차드 파커의 선택으로 치유될 수 있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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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큰을 넘는 테이큰은 없다. 테이큰2로 이미 증명된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여전히 그의 이름 한 줄에 설레는 까닭은 리암니슨표 액션 영화가 제시했던, 막힘없는 스피드의 전율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겠지요. 안티히어로가 득세하는 영화판에서 사연 없는 절대 악을 향한 망설임 없는 아빠의 처형은 마치 데스노트를 움켜쥔 라이토처럼 통쾌함의 절정을 안겨다 줬습니다.

 

 

 

 

 

얼핏 보기에 툼스톤은 리암니슨이 복제 중인 리암니슨표 액션 영화의 원투쓰리 같습니다. 테이큰, 테이큰2, 논스톱의 뒤를 잇는 속도 전쟁 액션 영화요. 영화 장르 또한 스릴러에 소재는 빠짐없는 부녀자 납치 사건, 천부적인 수사 능력을 가졌다 하는 리암니슨의 능력치는 역시 추격전의 기타지마 마야 아저씨의 스피드를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제시하는 듯했죠.

 

 

 

하지만 뜻밖에 툼스톤의 시간은 느리게 흘러갑니다. 무채색의 점잖은 연출은 건조하기 짝이 없고 리암니슨 또한 미행의 3단계를 논하며 느릿느릿 걸어가지요. 적 앞에 몸을 사리지 않고 스피드로 파리를 조져 놓던 아저씨의 야성미는 도대체 어디로 숨겨둔 걸까요.

 

논스톱 이후 위태로운 중독 상태를 추가한 리암니슨의 비틀비틀 불안한 걸음이 암전되면 몽환적인 오프닝의 포문을 열며 시작하는 툼스톤의 크레딧 화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잘 만들어진 장면이기도 합니다. 미국 드라마 덱스터의 그 유명한 오프닝에서 영감을 받은 듯한 로맨스를 스릴러로 도출해내는 반전이 압권인 화면이지요. 만약 영화가 이만큼의 완성도와 예술성을 시종 유지했더라면 분명 툼스톤은 테이큰을 넘는 테이큰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액션, 범죄, 드라마, 미스터리, 스릴러 등의 개요로 나누어진 툼스톤은 한 가지 장르로만 규명 지을 수 없는 가지각색의 이야기가 넘실대는 작품입니다. 무허가 사립 탐정 맷 스커터(리암 니슨 분)의 연쇄살인마 추적기를 기반으로 한 이 영화는 액션이라지만 정적이고 탐정극이라기엔 추리의 해답이 이미 초장부터 다 펼쳐지는, 장르의 룰을 비껴서는 영화입니다.

 

덧붙여 중독자가 사회에 귀속되는 과정과 영웅을 동경하는 홈리스 아이와의 유사 부자 관계, 마치 퇴마 의식을 하듯 중독자의 12계명을 외는 남주인공의 거룩한 자태는 알코올 홀릭 다큐멘터리와 홈드라마, 그리고 종교 영화를 뒤섞어 놓은 것 같은 어지럼증을 동반합니다. 느릿느릿 걸어가는 리암니슨에 연출마저 거룩하고 틀이 잡히지 않은 여러 장르가 뒤섞여 있으니 집중력이 떨어져 무려 리암니슨옹의 영화임에도 잠이 쏟아지는 미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문제의 핵심은 동떨어진 장르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접점이 부실하다는 것입니다. 감정과 동기라는 접착제를 등한시한 채 그저 장르를 나열하기만 하니 주인공의 행동에 의문을 갖게 되고 쉽사리 그의 감정에 동화할 수가 없죠. 마약상인과의 딜을 거부했던 맷이 마음을 돌려 청탁을 받아들였던 이유를 그저 범행 수법의 잔인함 때문에 라고 납득하기엔 대강은 이해해도 온전히 감정 이입은 되지 않아 보다 구체적인 부연 설명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마치 컬렉터처럼 마약 딜러만을 골라 납치 후 살해하고 전리품을 과시하듯 시신을 잘라내 흩뿌리는 범인의 특이사항 또한 후반부에 가선 흐지부지 되어 버리고요. 사연있는 악역을 동경하진 않습니다만, 그저 돈 때문에 그랬다기엔 앞에 뿌려놓은 사설이 너무 많았으니까요.

 

 

 

 

물론 주인공의 심리를 굳이 이해해보려고 애쓰며 집중한다면 개연성이 없는 사연이란 없습니다. <시종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과거의 죄를 알코올 중독에 치환하여 영원한 고통에서 허덕이는 맷. 경찰직을 버린 이후 사사로운 범죄 따윈 눈감고 넘어가지만 약한 자, 특히 여자와 어린아이를 학대하는 범죄에 증오심을 갖는 무허가 사립 탐정으로 재탄생했다.>

 

이렇게 해석하면 집 없는 아이에게 갖는 연민이나 부녀자 연쇄 살인마를 향한 적개심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스트레스 풀이용으로 찾는 액션 영화에서 이토록 공을 들여 작품을 감상할 관객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이지요. 대부분의 관객은 보다 직관적이고 친절한 설명을 필요로 합니다.

 

그것은 결국, 시리즈물의 주인공으로 더없이 잘 어울리는 탐정 캐릭터 맷 스커터를 공들여 설득시킬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제작진의 패착이겠지요. 역사가 긴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작품이기에 굳이 캐릭터의 세계관에 공들일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심지어 스크린에서 활약하는 맷 스커터의 이야기는 이번이 처음 또한 아닙니다.) 이미 다 아는 이야기에 부연 설명을 붙일 필요가 있을까 라고 생각했던 것일 지도요.

 

 

 

하지만 융화되지 못함이 안타까울 뿐 따로따로 뜯어보면 꽤 괜찮은 이야기들인 툼스톤의 소재처럼 각각의 캐릭터 또한 떨어뜨려 놓고 보면 상당히 쓸 만한 매력을 갖고 있습니다. 과거의 실수가 만든 죗값으로 가족과 커리어를 잃어버린 맷 스커터는 다소 특이한 발상의 탐정 캐릭터인데 결국은 오만 데가 결함투성이입니다.

 

딱히 파괴력 없는 신체적 능력은 그리 민첩하지도 않고 탐정이 필수로 가져야 할 직감 또한 그리 뛰어나 보이지 않습니다. 미행하려다 도리어 미행당하고 아둔한 범인이 칼을 들고 서있는데도 쉽사리 눈치를 채지 못해요.

 

그렇다면 이 가파른 죄악의 시대에 맷 스커터가 지닌 탐정 비기는 과연 무엇인가. 그건 뜻밖에 남자 어른의 노련미입니다. 자상함과 배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설득력이죠. 천재의 오만이 미덕인 탐정 세계에 그닥 부합하지 않은 캐릭터를 가진 사립 탐정 맷은 정말 그 노련미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성과를 취득합니다.

 

 

 

잔뜩 겁에 질린 어리바리 취조 대상의 맘을 구슬려 죄를 실토하게 하는 장면이나 간섭을 싫어하는 홈리스 아이에게 그가 가장 원하는 타입의 접근으로 맘을 열게 하는 부분은 바로 맷 스커터가 지닌 인간성의 미덕이 꽤나 쓸모 있는 비기임을 증명케 하지요.

 

이런 맷의 캐릭터는 꽤 인상적으로 봤었던, 요코미조 세이시의 소설을 실사화한 작품 이나가키 고로 주연의 긴다이치 코스케 TV 시리즈의 탐정 타입과 유사합니다. (네. 소년 탐정 김전일이 실체 없이 할아버지라고 주장하는 바로 그 인물입니다.) 산만하고 어리바리해서 도통 천재 탐정가의 면모라곤 느껴지지 않는 헐랭한 아저씨 긴다이치 코스케.

 

구깃구깃한 단벌 신사에 눈보라처럼 비듬을 흩날리며 머리를 벅벅 긁는 포즈로 혼 나간 듯 추리하는 그를 보면 도무지 사건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습니다만, 천재의 오만을 역겨워하는 연쇄살인마로서는 도리어 코스케의 다듬어지지 않은 인간미가 탐정VS범죄자라는 경쟁 구도를 무장해제 시키는 마법인가 봅니다. 오랜 기간 쌓인 인품에 반해 진심을 실토하는 살인마라니, 이 얼마나 매력적인 아이러니입니까.

 

 

 

리암니슨의 영화로서는 보기 드물게 기대감을 갖게 하는 호기심 가득한 범죄자의 캐릭터 역시 이 영화의 미덕 중 하나입니다. 특히 사건을 재연하는 순간 수화기로 전해들은 그의 음성은 그야말로 악마의 목소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커다란 충격을 안겨줍니다. 

 

갖은 스릴러 영화를 즐겨 봤지만 정체를 숨긴 자의 목소리 때문에 이토록 혐오감을 느껴본 적은 정말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리암니슨과 전화와 범인이라는 세 가지 코드는 정해진 패턴처럼 그를 쫓아다니네요. 테이큰에서는 협박을 하더니 논스톱에서는 협박 문자에 농락 당하고 이제는 실체보다 두려운 그놈 목소리라니. 그래서 핸드폰을 불신하는 툼스톤의 어쿠스틱 보이 맷 스커터는 전작의 문자 씨름을 비롯한 첨단 문물 싸움에 질릴 데로 질린 역효과가 아닌가 싶어 웃음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의 이름을 호명하기만 해도 스피드에 가슴 설레는 리암니슨표 영화에서 경보조차 안 되는 느릿느릿한 걸음은 분명 감질나긴 하지만 이제 50세를 넘긴 리암니슨에게 다가온 ‘툼스톤’은 시리즈물의 가능성을 예기하며 새로운 방식의 리암니슨표 액션을 제시합니다. 뛰지 않는 액션의 미학이라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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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뛰지 않는 액션의 미학이라...
    저도 이 영화를 보기는 했지만 미처 생각지 못한 표현입니다.
    전 많이 건조해졌는지...그저 리암 니슨이 많이 늙었구나...하고 말았는데 말입니다.ㅎㅎ;;

  • 안녕하세요..
    저는 처음에 '톰스톤'이 서부극인줄....
    이젠 '리암리슨'이 '와이어트 어프'로 나오는 구나라고 착각을...
    '톰스톤'이 묘석,묘비라는 뜻도 있지만,
    'OK목장의 결투'의 무대인 서부의 작은 도시(애리조나주 남동부)이며
    서부극의 중심지로
    이젠 사라진 미국 개척 시대의 신화 혹은 전설의 도시죠..
    영화 '톰스톤'은 액션이 있는'스릴러'계열 보다는
    건조한 '하드 보일드'계열 작품으로..보면
    '탐정','의뢰','살인','느슨한 플롯''건조한 연출'등이
    쉽게 이해되는 측면이...
    '추격액션스릴러'의 홍보 문구가 낚시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죠...
    스콧 프랭크 감독과 원작자 '로렌스 블럭'이
    ''대쉴 해미트의 말타의 매''"레이몬드 챈들러의 '빅슬립'''으로
    회귀하고 싶은 욕망이 느껴지네요...

    음악으로 비유하자면,
    "테이큰(액션 스릴러)"이 '락'이면,"톰스톤(하드보일드)"은 '블루스'

KBS 아나운서 손범수가 돌격대장으로 열연했던 ‘열전 달리는 일요일’이라는 프로그램을 기억하시는지. 거대 체력 훈련장 같은 세트 속에서 대학생의 체력, 정신력, 지력 등을 테스트 했던 일요일 아침의 에피타이저. 부여된 시련을 이겨내는 자만이 다음 관문으로 넘어갈 기회가 쥐어졌기에 훼방꾼인 귀신과 도깨비를 물리치는 청춘 남녀들이 어린 내 눈엔 꽤 심각해 보였더랬다.

 

 

 

 

 

모든 시련을 이겨낸 최후의 일인은 탈출 직전의 공중 다리 건너가기를 하게 되는데 마지막 관문이니 만큼 난이도는 상상 이상이었고 안전장치를 마련해 두었다지만 양 사이드에서 다리를 흔들거나 고무공을 던지는 도깨비를 물리치고 위태로이 고공 다리를 건너야 했던 도전자의 모습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릴이 있었다.

 

너무 해묵은 이야기라 내 추억이 아니라면 보다 가까운 기억의 ‘보야르 원정대’라는 프로그램은 또 어떠하신지. 프랑스 서부 해안에 심어둔 해상 요새 포트 보야르에서 19명의 스타가 펼치는 험난한 미로 탈출기 보야르 원정대는 거미 소굴에서 열쇠 찾기, 속이 보이지 않는 복불복 단지에 손 집어넣기, 바퀴벌레와 두꺼비가 우글대는 방에서 힌트 찾기 등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관문을 통과하여 미로를 빠져나가는 서바이벌 쇼였다.

 

 

 

얼기설기한 기억 속에 유달리 또렷하게 남아있는 향수는 역시나 미로의 최종 관문이다. 테스트 자체보다 그것을 통과했을 때, 최후의 고지에서 얻어낼 수 있는 결과물이 무엇인가가 더 궁금했었던 것 같다. 고공 다리를 건너면, 호랑이 소굴에서 금화를 집어내고 나면 어떤 세상이 펼쳐질 것인가. ‘그리고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뒷이야기가 궁금한 동화책처럼 커튼이 닫힌 미로의 건너편은 미지의 세계다.

 

인간은 정말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갖고 있구나! 라고 감탄하게 하는 작품들이 있다. 메이즈 러너 또한 재기발랄한 아이디어가 빛나는 작품이다. 기억이 소각된 채 공터에 떨어진 무수한 소년들. 그들의 행동반경을 제압하는 거대 미로. 폐쇄된 환경에서 만들어낸 소년들만의 작은 생태계.

 

 

 

시작하자마자 숨이 턱턱 막히는 철장 도르래에 갇혀 올라온 주인공이 자신을 내려다보며 농을 던지는 소년들에 놀란 토끼처럼 웅크려 있다가 가공할 만한 스피드로 공터를 뛰어나가는데 나자빠진 주인공을 훑어 지나가며 원을 그리는 카메라가 이 아이를 막고 선 무언의 존재를 보여줄 때 관객은 그와 함께 얼이 빠지게 된다. 마치 출구가 없는 고대 경기장처럼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무한의 벽. 그 압도적인 중압감에 아찔함을 느껴 현기증이 나는. 이게 바로 메이즈러너의 세계다.

 

이런 부류의 15소년 표류기에서 스토리 보다 더 거룩한 미학은 캐릭터의 매력이다. 메이즈 러너 또한 십인십색의 개성을 표출하는 남자들로 승부를 보는 작품이다. 소년과 청년 그 어드메에 서있는 앳된 얼굴에 건장한 육체를 가진 집 없는 아이들이 또 다른 진짜 사나이의 교본을 증언하며 여심을 설레게 한다.

 

 

 

 

역변이 무어냐고 온몸으로 외치는 중인 러브 액츄얼리의 드럼 치는 소년, 토마스 생스터는 그룹의 2인자로 팀의 정신적 지주를 담당하는 지적인 인물, 뉴트를 연기했다. 유별나게 소년 같은 얼굴에 고전 초상화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는데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얀색인 뉴트는 그 자체로 번쩍번쩍 빛나는 발광체 같다. 피터팬을 형상화한 얼굴을 갖고 있어 사전 정보 없이 이 영화를 찾았다면 이 글레이드에 갇힌 아이들은 그가 물어다놓은 네버랜드의 주민들이 아닌가 싶다.

 

우리의 주인공, 토마스 역의 딜런 오브라이언은 역시 만천하의 주인공답게 정의 앞에 고집불통인지라 속 터지게 하는 순간들이 있지만, 역시 이런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오지랖을 좀 떨어줘야 스토리가 진행이 된다. 더군다나 폐쇄된 공간에서 흔히 벌어질 법한, 성인군자조차 미쳐가는 배틀로얄 류의 서바이벌 전쟁 없이 워낙 순진하고 순수한 아이들이 모여든 글레이드라 주인공의 캐릭터가 딱히 모났다는 생각 또한 들지 않는다.

 

 

 

 

공터의 일인자 알비(에멜 아민 분)은 신참으로 영입된 토마스에게 이 마을에 유입되려면 몇 가지 법칙을 지켜야 한다고 일러주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친구들을 공격하지 말 것이다. 그 가르침을 뼛속 깊이 새겨들었기 때문인지 몰라도 친구를 구하겠다는 일념 하나에 압사의 공포를 무시하고 몸을 던지는 토마스의 선택은 분명 오지랖에 고집불통이랄 수 있지만 덕분에 이 영화 속에서 가장 스릴 넘치는 감동을 선사해준다.

 

극한의 상황에서도 인간성을 상실하지 않은 소년들과 그저 스피드와 체력이 남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타인을 대신해 그것도 매일 아침을 아비규환의 미로 탐험을 하는 메이즈 러너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 영화의 지향점이 생존 게임에서 요구하는 이기심이 아닌 희생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행동반경을 제압하는 미로와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간악한 짐승의 울부짖음에도 인간성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 무려 3년간 다져왔던 소년들의 규칙이 눈물겹다. 그래서 규칙을 사수하려는 갤리(윌 폴터 분) 또한 악역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시스템이 만들어낸 희생양일 뿐.

 

 

 

팀의 정신적 리더와 육체적 리더 모두 흑인과 유색인종이 사수했다는 사실 또한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관용이 녹아들어 있는 글레이드의 정신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장치랄까. 특히 메이즈 러너의 리더로 등장하는 한국인 캐릭터 민호(이기홍 분)은 역대 할리우드에서 맡았던 국내 배우의 역할을 통틀어 가장 매력적인 인물을 연기해 시선을 사로잡는다.

 

 

 

미로를 탐험하는 메이즈 러너는 글레이드 내에서 가장 빠른 다리와 강한 체력을 가진 인물로 구성된다. 그러니 메이즈 러너를 이끄는 리더 민호는 그야말로 에이스 중의 에이스인 것이다. 그런 만큼 구성인물 중에서 가장 독보적인 매력을 자랑하는데 무엇보다 멋진 것은 딱히 한국인이라는 부연 설명 없이 그 자체로 ‘어썸한 민호’라는 이미지의 해방이었다. 문이 열리기 직전 미로 앞에 서서 비장한 표정으로 전의를 다진 뒤 치타처럼 달려 나가는 그 모습에 가슴이 요동치지 않은 사람이라면 당신은 여자가 아니다.

 

 

 

영화 미스트와는 정 반대의 행동 강령을 요구하지만 꿈과 희망이 있는 결말을 찾아내기엔 너무나 아득하고 고단한 미로. 판타지 세계가 제시하는 두 가지 인생의 지침서가 우리를 상념하게 한다. 안온하게 사육당할 것인가, 위험한 자유 속으로 방임될 것인가.

 

글의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자료의 저작권은 해당 제작사와 신문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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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영화를 텍스트로 삼기에는 진짜사나이가 안고 가야 하는 짐이 너무 무거운 것 같습니다.
    리얼이라는 허상과 홍보라는 압박을 먼저 내려놔야 하는데....둘 다 힘들겠죠.

- 소년만화로 돌아온 타짜 신의 손이 상징하는 세 가지 의미

 

조승우, 김혜수, 백윤식, 유해진, 김윤석, 이수경을 대신해 최승현, 신세경, 이하늬, 이경영, 곽도원으로 채운 타짜2 : 신의 손은 기름기를 쫙 뺀 참치처럼, 가벼워 예쁜 팬시상품과도 같았습니다. 전작이 24시간 팔팔 고아낸 명인의 순대국밥이라면 타짜2는 한 봉지의 사리곰탕인 거죠. 하지만 짜장면 먹고 싶은 날이 있고 짜파게티 먹고 싶은 날이 따로 있는 것처럼 가볍다고 해서 타짜의 가치가 퇴색된 것은 아닙니다.

 

 

 

도박판의 아귀(김윤석 분)이 꾼의 악몽이라면 타짜 전설의 시발점이자 스스로 노름판의 유토피아가 된 고니(조승우 분) 타짜 시즌2는 고니의 유전자를 가진 조카, 함대길(최승현 분)의 일대기를 담은 영화입니다.

 

 

 

고니의 조카라는 프로필 하나만으로 타고난 천재성이 증명되는 노름판의 기타지마 마야, 함대길. 때문에 음지의 기술을 전수 받는 즐거움이나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처럼 초짜를 성장시켜 고수로 키워내는 성장드라마로서의 재미는 빈약해졌죠. 배워봐야 좋을 것 하나 없겠지만. 상실된 전문성만큼이나 완성도가 덜해 보이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타짜는 이미 공인된 천재인 함대길의 손기술을 설파하는 대신에 보다 밀접한 인간관계의 배신과 반목, 그리고 소년의 순애보로 서사를 채웠습니다. “네가 날 살려줬으니까 이제부터 내 목숨은 네 거다.” 이런 함대길의 캐릭터는 동일 작가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 속 까치, 오혜성의 이데아와 더 닮아있습니다. “네가 곧 나에겐 신이었고, 그 편지가 성전이었다. 언젠가 말했지만,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한다.”

 

 

 

전작에서 고니의 끝판 대장이었던 아귀가 재등장해 극의 클라이맥스를 담당하지만, 사실 그의 등장은 팬에게 바치는 헌사나 카메오의 영역에 더 가깝고 타짜 신의 손에서 아귀VS고니의 구도를 담당하는 관계는 주먹을 부르는 사나이, 배우 곽도원이 연기하는 장동식과 함대길의 포지션이죠.

 

 

 

영화는 흥미롭게도 까치 함대길의 엄지 같은 그녀, 히로인 허미나(신세경 분)을 성물처럼 내세워 그녀를 통한 구원이 곧 신의 손이 되는 도리임을 두 남자의 결말에 비추어 해답을 제시합니다. 허미나에게 삶을 구원 받은 함대길, 그녀에게 있어 거둬가는 것조차 더러운 목숨인 장동식의 최후가 어떤 식으로 마무리 되었는가를 비교해보는 것 또한 극의 숨겨둔 묘미죠.

 

 

 

전작이 워낙 주연에서 조연까지 연기판의 타짜인 배우들만 불러 모은 작품이었기에 누가 캐스팅된다 해도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자리였지만, 제작진이 과감하게 기용한 아이돌 출신 배우 최승현(빅뱅의 탑)과 아직 영화판에서 입지가 굳지 않은 신세경, 배우보다 모델의 수식어가 더 어울리는 이하늬의 캐스팅은 무모하다싶을 만큼 도전적이었지요.

 

그러나 이 무모했던 도전은 소년 만화 같은 타짜2와 비교적 잘 어울려 완숙미를 대신한 풋사과 같은 즐거움을 줍니다. 후반부에 ‘그분’이 등장하시어 격이 다른 연기를 보여주십니다만, 물 흐르듯이 전작과 후속작 모두에 잘 어울렸던 유해진과 달리 도리어 넘쳐서 사족이 아닌가 싶은 송구스런 불만이 들더군요.

 

 

 

데뷔부터가 임권택의 이몽룡이었던 조승우와 빅뱅의 탑으로 더 익숙한 최승현을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건 무리수입니다. 다만 타짜2의 주인공 최승현은 전작의 조승우와 대결하지 않고 친목하며 자신만의 매력을 슬그머니 소개해봅니다.

 

주로 과묵한 역할을 도맡았던 그가 이번엔 휘어진 눈을 하고 능글맞게 치고 빠지는, 한 마리의 고등어 같은 미끈덩한 연기를 제법 쫀쫀하게 소화해냈습니다. 무게를 잡는 것보다 덜어내는 연기가 더 까다로운 만큼 이번 작품은 그에게 기념비가 될 만한 필모그래피라는 생각이 듭니다.

 

중반 부분까지 상당히 자연스러웠던 그의 연기가 뜻밖에도 절규하는 부분에서 무너지는데 이 장면이 어떻게 OK사인을 받았지? 싶을 만큼 의아한 수준이었습니다. 첫 촬영이었거나 빨리 찍고 가야 하는 상황이었거나 아무리 찍어도 이상의 최선이 나오지 않는 절망적인 상태였거나 그랬겠지요.

 

 

 

제게 있어 인상적이었던 연기와 캐릭터는 짜리 역의 이동휘와 이하늬가 연기한 우사장이었습니다. 개그콘서트의 막시무스(김재욱 분)을 닮은 얼굴의 사근사근하고 친절했던 그가, 비뚤어진 살리에리의 열등감으로 일그러지는 연기가 인상적이더군요.

 

자연스럽게 느물대면서 감정의 변화를 이질감 없이 소화해내는 – 그에게 할당된 지면이 그리 충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 충실한 연기는 이 작품에서 감독이 요구했을 연기톤의 최상을 실현해내는 느낌이었습니다.

 

 

 

복수 당할 짓을 하고도 도리어 피해자를 향한 적개심을 품는 독특한 가해자, 우사장 역의 이하늬는 감추는 것 없이 원색적으로 모든 것을 드러내는 캐릭터임에도 묘한 여운을 남기는 미스터리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가 스스로 선택한 최후는 이 작품에서 가장 무겁고 그로테스크한 감동을 전합니다.

 

 

 

타짜, 신의 손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 제목입니다. ‘판을 지배하는 이는 패를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최고의 패를 가진 순간에 내려놓을 수 있는 손. 그게 바로 모든 꾼들의 유토피아, 고니가 가졌던 신의 손이죠. 허미나가 건넨 구원과 용서의 손, 구원을 거부하고 악몽을 선택하여 문을 닫아버린 우사장의 손, 그리고 고니 유전자가 대길에게 남긴 진짜 유산인 신의 손. 세 개의 손이 상징하는 의미가 인생의 철학이 되어 가슴에 파고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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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9.06 17:36

    비밀댓글입니다

  • 안녕 하세요.
    강형철 감독은 신파 요소를 현대적으로 맛깔나게 잘 뽑는 감독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최동훈 감독은 장르에서 오는 긴장감과 쾌감을 배우들 연기 속에서 맛깔나게 뽑는 재능이 탁월하다고...
    세부적으로 보면는 최동훈감독과 강형철 감독하고 재능은 차이가 있는데, 전체적으로 보면
    강형철 감독이 최동훈감독의 아류필이 나는 그런 평가가 '타짜2'에서도 동일하게 평가 절하 되도 별 무리가 없네요.
    개인적으로는 처음 계획대로 '장준환'감독으로 가는 편이 최소한 아류작이라는 평가는 피할 수도 있었는데, 아쉽네요...
    '최승현'은 가수로서 빅뱅의'탑'과 배우로서'최승현'으로 나누었으면,
    최소한 아이덴티티(자기 정체성)도 나누고 가야 하는데,
    빅뱅의 '탑'과 배우의 '최승현'의 차이점도 없고,
    그냥 동일 인물이라는 ....
    배우를 하고 싶은 아이돌 스타 느낌 정도....
    그래도, 이 영화의 재미 있는 점은
    '모짜르트(CJ,최동훈,김수현)후예는 되고 싶은데,
    살리에르(롯데,강형석,최승현)후예로 살아 갈 수밖에 없는
    배급사(롯데),감독(강형석),배우(최승현)가 같은 작품의
    후속작에 나온 점은 재미있는 '기프트 선물'이네요....
    * 개인적으로 모든 살리에르 후예들을 좋아합니다.
    ('이순신 장군'보다는 '권율 장군'을 '김연아'(1인자의 완변함)보다는
    '아사다 마오'(2인자의 불안함)를 더 좋아합니다.)
    비록 '모짜르트'는 될 수 없지만,
    '악성_베토벤'의 스승이 될 수 있는 살리에르를....

해적 충무로를 깜짝 놀라게 한 뜻밖의 선전 혹평 속에서 700만 뛰어넘은 비결은

 

군도, 명량, 해무. 그 사이에서 문 열기 전부터 쏟아지는 혹평에 숨 돌릴 틈도 없이 최저의 성적을 기록하리라 예상되었던 해적이 뜻밖의 선전으로 충무로를 놀라게 하고 있다. 25일 오후 4시 700만을 돌파한 해적: 바다로 간 산적의 흥행 속도는 날이 갈수록 힘이 빠지기는커녕 도리어 가속도가 붙어 1600만 관객의 명량의 기세에도 파죽지세로 치솟고 있는 중이다.

 

해적의 선전에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은 여름 방학 특수로 쏟아진 국내 영화들 가운데서 가장 모진 혹평에 시달렸던 작품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한판 붙어보기도 전에 쏟아지는 비판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모진 매를 맞아야만 했던 해적. 나는 충무로판 여름 방학 블록버스터의 첫 테이프를 이 작품으로 끊었었다.

 

 

 

해적에 쏟아졌던 비난은 150억을 쓰고 고작 코미디 영화를 만들었냐는 조소와 배우 유해진의 개인기 외엔 볼 것이 없는 작품이라는 두 개의 논조였다. 이미 일찌감치 이 영화를 보고 온 내게 사실 위의 비난들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해적은 150억을 들인 코미디 영화인 것도 맞고 배우 유해진의 장기가 빛나는 영화인 것도 맞다. 이 영화를 호평과 혹평의 두 가지 갈림길로 나뉘게 하는 것은 저 두 가지 사례를 단점으로 받아들이느냐 장점으로 받아들이느냐, 즉 온전히 관객의 가치관이 결정할 몫이다.

 

 

 

고려조의 옥새를 명나라에 반납한 이후 1392년부터 1403년까지. 무려 10년간 옥새를 갖지 못했던 1392년 이성계의 조선 건국 초기. ‘만약에 말이야. 그 옥새를 명나라에서 가져오느라 바다를 건너던 신하들이 거대한 고래를 만나 사투를 벌이던 도중 떨어진 옥새를 고래가 삼켜버렸다면?’ 영화 해적은 ‘만약에…’로 시작한 귀여운 상상을 역사적 사실에 버무린 판타지 어드벤처 퓨전 사극이다.

 

배신과 반목. 역사의 돌이킴에 사회 비판적인 요소까지 묵직한 소재를 싣고 가는 해적이지만 극을 아우르는 기본적인 정서는 코미디를 기반으로 한다. 그러니 150억을 들인 코미디 영화라는 비판은 틀린 말이 아니지만, 극에 거는 기대를 하드보일드한 블록버스터 무비가 아닌 신명나는 모험 영화에 바로 맞추어 본다면 150억이라는 쓰임새에 의문을 품게 되진 않을 것이다.

 

 

 

옥새를 실어 명나라에서 조선으로 향하는 배는 그저 숨 쉬기 위해 물 위에 떠있을 뿐인 짐승이 나랏일 하는 사람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는 이유만으로 새끼 고래에게까지 무자비한 발포를 해대는 무식한 책임자를 운반하고 있었다. 고래 또한 조선에 속한 생명이라면, 땅에 발을 딛기도 전에 살육을 일으킨 피 묻은 옥새가 탐탁지 않은 것은 당연지사.

 

 

 

비록 바다의 도적일지언정 다친 고래의 상처를 쓰다듬을 줄 아는 해적선의 대단장 여월과 고래조차 삼켜버린 주권 잃은 옥새의 존재 가치를 상기하게 하는 산적 패거리의 두령 장사정의 산과 바다를 넘나드는 모험과 액션 그리고 사랑이 한편의 흥겨운 뮤지컬이나 극장판 애니메이션처럼 장대하게 펼쳐진다.

 

그러니 극장을 나서면 영화적 재미 이상의 선명한 즐거움이 있다. 만약 이 영화를 놀이 기구에 비유한다면 자이로드롭이나 바이킹의 짜릿함이 아닌 신밧드의 모험 (커다란 배를 타고 동굴을 탐험하는 이야기 형식의 놀이기구) 이 주는 동화 같은 잔재미랄까.

 

 

 

해적은 분명 유해진의 개인기가 빛나는 영화인 것도 맞다. 가문의 재담꾼인 사촌형처럼 쉴 새 없이 입을 놀려 꿍얼꿍얼하는 그의 입담을 듣고 있노라면 도대체 어디까지가 대본이고 어디까지가 애드립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화 해적을 ‘유해진이 다한 영화’라고 평하기엔 다소 억울하다. 유해진이 아닌 다른 배우들 또한 제몫을 단단히 해주고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포니테일이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은 남자, 배우 김남길의 미래 소년 코난과 안장을 채울 수 없는 야생마 같은 매력.

 

 

거대 선단으로 바다를 호령하는 해적선의 대단장이라는 임무에 맞지 않게 다소 무겁고 둔탁해보이지만, 그럼에도 영화 클래식 이후 오랜만에 손예진스러운 미모를 자랑하는 그녀. 이젠 그가 안 나와도 기시감이 느껴질 만큼 21세기 이후 모든 영화에 출연하는 것 같은 이경영이지만, 타락한 수장 역할은 이 사람만한 인물이 없다고 생각되는 배우 이경영의 악역 변신.

 

 

 

어느 샌가 슬그머니 악역 전문 배우로 자리 잡은 김태우의 선량한 얼굴이라 더 서슬 퍼런 악의. 해적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캐릭터가 크고 작은 코믹 연기의 담당자지만 양대 산맥으로 웃음의 줄기를 이어가는 박철민의 웃음보 또한 유해진에 못지않다. 유해진이 만담하듯 주저리주저리 긴 설을 풀어놓으며 웃음을 유도하는 타입이라면 이분은 끄트머리에 치고 빠지며 깔끔하게 폭소를 이끌어내는 타입이랄까.

 

 

 

 

제대로 문을 열기 전부터 쏟아진 영화 해적을 향한 잔인한 혹평. 논지 자체는 헛다리를 짚은 것은 아니었지만, 관점을 달리해서 본다면 150억을 들인 코미디 영화라는 수식어는 오히려 이 영화의 장점으로 와 닿을 수 있는 작품이다. 그다지 덥지 않았던 올해 여름 태양을 등지고 산과 바다를 누비며 모험을 떠나는 이들이 선사하는 대리 체험은 충분히 관객을 즐겁게 한다.

 

글의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자료의 저작권은 해당 제작사와 신문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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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센던스, 신과 인간이 충돌할 수밖에 없는 이유

 

트랜센던스 (Transcendence, 2014)장르액션, 드라마, SF2014.05.14 개봉런닝타임 119분출연 조니 뎁, 레베카 홀, 모건 프리먼, 폴 베타니, 킬리언 머피

 

극의 후반부 주요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별한 날도 아닌데 일상처럼 외화를 즐겨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만화 영화나 이해하기 쉬운 블록버스터급 대작이 아닌 어린아이에겐 심오한 내용의 소규모 걸작들이 주를 이었지만, 단상처럼 스쳐 가는 몇 개의 장면이나 성우의 목소리는 여전히 뇌리에 남아있어요. 문제는 대체로 오다가다 혹은 채널을 돌리다 본 것들이라 대부분의 제목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이죠. 인터넷이 대중화되고 포털사이트가 활성화되었을 때 가장 먼저 구했던 정보의 이름이 바로 그 시절 봤던 어느 인상적인 영화의 제목이었습니다.

 

인공지능 컴퓨터와 하루를 여는 부부. 인공지능 전문가인 과학자 남편이 자리를 비운 사이 그의 아내를 지배하기 위한 슈퍼컴퓨터의 반란이 시작되죠. 그가 하인이었을 때까지만 해도 마냥 편리하기만 했던 컴퓨터의 컨트롤 능력이 한순간 재앙으로 뒤바뀌어 버립니다. 안주인을 굴복시키기 위해 친한 소녀를 감전사시키는 환영을 지속적으로 보여주던 장면. 도대체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 거냐고 외치는 그녀에게 우아하고 정중해서 더 섬뜩했던 성우의 연기가 전한 한마디는 지금도 어제 들은 듯 선명합니다. "우리……. 아이요." 몇 개의 키워드로 알아낸 이 영화의 제목은 바로 프로테우스4였습니다.

 

 

 

인공 지능을 가진 슈퍼컴퓨터가 인간을 노예로 부리게 될 것이라는 공포는 첨단 사회라 불리는 21세기에도 여전합니다. 무려 1977년의 영화인 프로테우스4의 세계관이 구축한 인간의, 인공지능을 향한 경외심이 2014년의 영화 트랜센던스에도 남아있으니까요. 인간은 새로운 것을 이해할 수 없어 두려워하며 그래서 결국,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인공지능을 찬미하는 천재 과학자 윌 캐스터(조니뎁 분)이 그가 개발 중인 인공지능 기술을 발표할 때 가슴이 받아들일 수 있는 용량만큼만 이해하며 신기해하고 농담에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던 관중이 그것에겐 이 자리에 앉은 모두의 지능을 합친 것마저도 '기초 지능'밖에 되지 않는다는 정보엔 웃음기가 가셔버리죠.

 

받아들일 수 있는 강도의 이해심을 넘어섰던 것입니다. 인간이 지배할 수 없는 컴퓨터는 이미 기계가 아닌 것. 공포에 질린 누군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윌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신을 창조하려 하십니까?" "인간은 늘 그래 왔지 않나요?"라는 윌의 우문현답.

 

인공지능 이상의 인공지능. 즉 트랜센던스를 개발 중이었던 윌은 이를 저지하려는 반 과학단체 RIFT에게 테러를 당하고 그의 몸은 심각한 방사능 오염에 침투되어 시들어 갑니다. 그리고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 이상의 천재 과학자이자 윌의 아내, 에블린. 비록 기술력은 그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꿈의 크기와 그것을 실현 하리라는 믿음만큼은 윌 이상이었던 그녀는 슈퍼컴퓨터 핀의 부속을 그의 뇌파와 연결해 윌의 정신을 인터넷이라는 우주 위로 업로드 합니다.

 

육체는 소멸 되었지만 살아있을 때보다 더 방대한 범위의 세계를 갖게 된 윌. 슈퍼컴퓨터의 트랜센던스가 인간의 정신과 영혼마저 복제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이거야말로 궁극적인 플라토닉 러브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이 영화는 묘하게 '사랑과 영혼'을 닮아있기도 합니다.

 

 

 

인공지능을 가진 컴퓨터에게 지배당하는 세계를 그린 기존의 영화들은 줄곧 인간성만이 선이며 기계를 차단하는 것이 곧 정의라고 그리곤 했었습니다. 트랜센던스에서 그린 기계와 인간의 관계 또한 하등 다를 바가 없어 보입니다.

 

트랜센던스가 된 윌의 힘은 분명 편리하고 효율적이며 또한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증권가를 조작해 순식간에 몇백 억을 벌어들이고 선천적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이에게 빛을 선사하며 심지어 죽은 사람을 부활시키는 데까지 이르렀으니까요. 하지만 편리하게만 느껴졌던 그의 힘이 정신을 지배하고 육체를 조종하여 그의 뜻대로 움직이게 되자 인간은 공포를 느낍니다.

 

심지어 그의 아내 에블린마저도, 그녀의 호르몬 수치까지 외고 있는 남편에게 환멸을 느낍니다. "내 정신은 내 거야!"라고 외치는 에블린. 너의 모든 것을 알고 조종하는 것이 네게 이로울 것 같았다는 윌. 이건 마치 자유의지와 순종 사이에서 갈등하는 신과 인간의 오랜 싸움과도 닮아있지 않습니까?

 

 

네. 공상 과학 영화 같은 트랜센던스는 뜻밖에 감히 기계가 침투할 수 없는 영역인 신의 권능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그려내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윌의 궁극적인 목표 - 상처 난 세포를 재생하는 것 - 또한 예수의 업적과 일맥상통하지요. 앞 못 보는 자를 눈 뜨게 하리라. 죽은 자를 부활시키리라.

 

윌은 아담에게 신이 그랬던 것처럼 아무것도 너희들에게 바라지 않고 오로지 나를 믿어줄 것, 의심 없이 순종할 것을 권고합니다. "왜 나를 믿지 않았어." 돌아온 에블린에게 되풀이해서 묻는 윌의 목소리. 그건 마치 선악과를 따먹은 하와를 향한 신의 배신감과도 닮아 보이더군요. 그러나 윌은 미래를 볼 수 있는 초인 그리스도가 그로 인해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유다를 버리지 않았던 것처럼 바이러스를 품어온 에블린을 받아들입니다.

 

 

 

 

트랜센던스의 세계관은 모든 신화의 근간이 되는 신과 인간의 전쟁입니다. 자유의지를 중간에 놓은. 신은 인간에게 순종할 것을 권고합니다. 물론 그건 우리를 위한 거죠. 윌의 사고를 이어받은 하이브리드처럼 신의 말을 따르기만 한다면 전쟁이나 오염된 환경 또한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자유의지를 갈구하지 않는 인간이라니. 좀비와 하등 다를 것이 없습니다. 만약 인간에게 다시금 선택권을 준다고 해도 그들은 몇 번이고 선악과를 따먹을 것이고 몇 번씩이나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것입니다. 그리고 신은 그가 여태껏 만든 것 중 가장 시건방진 이 골칫덩이에게 수시로 배신을 당하면서도 아니 당할 것을 알면서도 그들을 버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신과 인간이 가진 숙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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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괴담 후기 이건 공포영화가 아닌 순정만화? 귀신소동보다 두려운 학교 폭력의 실체

소녀괴담장르공포, 스릴러2014.07.02 개봉런닝타임 90분출연 강하늘, 김소은, 김정태, 한혜린, 박두식


 

 

때는 90년대 초반. 사교육이 성행하던 시기였고 아이들은 늦게 귀가했다. 때문에 이 시절 유행했던 괴담의 어원은 대체로 학원 갔다 다른 길로 새는 아이들을 집으로 불러들이기 위한 부모님의 공포정치였다는 설이 많다. 그때 한창 아이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괴담 두 개가 홍콩 할매 귀신과 빨간 마스크 괴담이었다.

 

 

빨간 마스크 괴담은 일본에서 유래한 것으로 일본의 도시전설 중 하나인 ‘입 찢어진 여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귀 밑까지 걸린 찢어진 입을 감추느라 입을 가렸고 하얀 마스크는 피로 물들어 빨간 마스크가 되었다. 입 찢어진 남자 조커의 유래가 오락가락한 것처럼 그녀의 탄생설화 또한 전개가 불분명하다.

 

다만 이 섬뜩한 몰골의 망령이 지나가는 아이를 붙들고 “나 예뻐?” 라고 묻는데 비위를 맞춰주기 위해 그렇다고 대답하면 그럼 너도 나처럼 예쁘게 만들어 줄게-하고 입을 찢어버린다는 공포의 박력은 캐빈 인더 우즈 안에서도 상급이지 싶다.

 

 

 

 

 

이야기의 각별한 그로테스크함과 희소가치 때문에 빨간 마스크 괴담은 성황리에 제작중인 공포 무비의 소재 중 하나다. 일본에서는 시리즈만 해도 몇 편씩이나 만들어지고 있는 이 빨간 마스크 아가씨의 이야기를 귀신이 보이는 소년의 트라우마 극복기와 하이틴표 사랑과 영혼, 그리고 학교 폭력을 향한 섬뜩한 경고를 버무려 만든 안 무서운 공포 영화가 바로 소녀괴담이다.

 

남주인공 강인수(강하늘 분)은 귀신을 볼 수 있는 소년이다. 아니 그 능력에 자율성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귀신이 보이는 소년이라고 말하는 게 더 어울리겠다. 인수는 시시때때로 귀신을 보고 소리를 듣지만 애써 외면하며 못 본 척을 한다. 귀엽게도 귀신들은 그가 모르는 채 하면 진짜 못 보는 줄 안다. 인수가 귀신을 외면하는 이유는 한 많은 귀신들의 원한을 풀어달라는 부탁이 버거워서다. 좀 매정하다 싶어도 귀신을 보는 인수가 겪어야만 했던 어린 날의 상처를 떠올리면 도리어 애처롭다.

 

 

 

소녀괴담의 공포는 초현실적인 대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보다 물리적인 고통에서 비롯된다. 우리를 공포에 떨게 해야 할 귀신은 귀엽고 사랑스러운데다 애처롭기 그지없어 차라리 지켜주고 싶은 대상이다. 더군다나 빙의라는 시스템을 도입하여 공범자를 앞세우고 소녀 귀신은 마치 대역을 쓰는 여주인공처럼 소심하게 굴어 초현실적인 공포가 안겨주는 재미는 별반 없다. 차라리 극의 장르를 살인마의 스릴러로 바꾸어야 할 수준이랄까.

 

발상을 달리해보면 빨간 마스크 괴담 자체가 인간의 영역을 초월한 귀신의 저주인지 아니면 싸이코패스의 살인 행각인지의 구분이 모호하기에 덩달아 소녀괴담의 장르 또한 불명확해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리 섬세하게 차츰차츰 공포를 끌어올리는 연출이 아니라서 눈으로 보는 공포는 투박하고 성글다는 생각이 들만큼 멋이 없다.

 

차라리 이 영화는 청각적 효과의 공포가 더 크게 느껴지는데 자신의 시체와 대면한 찢어질 듯한 귀신의 울음소리와 비닐봉지를 타고 떨어져 내리는 핏방울 소리, 귀신의 노크보다 더 섬뜩한 칠판을 긁는 분필의 신경질적인 소음 등.

 

 

 

이 영화의 장르를 공포로 규정지으면 그저 그런 가치 없는 작품으로 기억될지 모르지만 소년 소녀의 순정 만화 같은 사랑이야기라고 달리 생각해보면 꽤나 희소가치가 있다. 버스 정류장에 선 귀신 소녀를 버스 창가로 내려다보며 시선이 얽히는 소년과 소녀.

 

 

이 장면은 공포 영화의 귀신 등장! 같은 섬뜩한 느낌 하나 없이 특이하게도 멜로 영화에서 첫사랑에게 반하는 순간처럼 연출 되었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역대 하이틴 로맨스 중 가장 특이한 첫 만남이 아닐까 싶다. 핏기 하나 없이 허연 시체 색깔 얼굴의 귀신 소녀를 마치 영화 클래식의 손예진이나 건축학개론의 수지처럼 비추어지게 하는 기묘한 연출이라니.

 

 

 

물론 소녀괴담은 잘 만든 귀신 영화, 혹은 공포 영화가 아니다. 혹평 받는 영화가 대부분 그렇듯이 여러 장르가 느슨한 이음새로 뒤엉켜 전문적인 장르물의 맛이 없고 다소 유치하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그리 무섭지가 않다. 사람마다 느끼는 공포의 개인차야 다 각각이겠지만 단호하게 무섭지 않다고 외칠 수 있는 건 이건 공포 영화의 틀을 갖추지 못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다만 귀신에게 첫사랑을 느끼는 소년의 소나기 같은 순애보와 어린 날의 상처를 갖고 있던 소년이 자신의 결함이라고 생각했던 초인적 능력을 타인을 도울 수 있는 기회로 치환하는 성장 스토리라는 점에서는 꽤나 희소가치가 있다. 더군다나 귀신소동보다 더 섬뜩한 학교 폭력의 서슬 퍼런 실체는 이 영화가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절실하게 전달해준다. 도움을 호소하는 귀신이 보이면서도 자신에게 올 피해가 두려워 모른척했던 인수처럼 학교 폭력 또한 한명의 가해자가 아닌 수십, 수백명의 방관자가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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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남자, 남자 장동건이 아저씨 원빈을 뛰어넘을 수 없었던 까닭

우는 남자장르액션, 드라마2014.06.04 개봉런닝타임 116분출연 장동건, 김민희, 브라이언 티, 김희원, 김준성

 

남을 죽이는 일을 업으로 삼는 냉혈한이 한 사람에게만 인간의 감정을 품는다는 것은 어떤 서사를 덧붙여도 그리 수긍 가는 행동이 아닙니다. 도리어 사연을 풀면 풀수록 구차해지고 개연성의 허점만 집착하게 할 뿐이죠. 그러니 차라리 이런 이야기는 논리가 아닌 감정으로 설득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일순간의 감정 때문에 자신이 의도치 않은 일탈을 하게 될 때가 있으니까요.

 

 

 

타인의 생사에 큰 동요가 없는, 뿌리 내린 식물 같은 남자 레옹이 살인 청부업자에서 소녀의 보디가드가 되어버린 이유. 그건 오로지 조그만 틈으로 들여다본 가냘픈 소녀의 가녀린 구조 요청 한마디였습니다. “살려주세요. 제발. 이 문을 열어주세요.” 마틸다와 레옹이 주고받은 일순간의 교감. 이렇게 되면 딴죽을 걸 이유가 없어지죠. 그 순간의 필링이라는데요.

 

 

 

우는 남자는 마치 혼날까 봐 몸을 사리는 어린아이처럼 살인자 곤이 어찌하여 연인도 친구도 지인조차 아닌 모르는 여자 때문에 평생을 몸담아온 조직을 버리게 되었는가를 참 구구절절한 방식으로 설명하려 애를 씁니다. 비극은 사연을 부여하면 부여할수록 장동건의 심리가 피곤하게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채무 관계에 얽힌 살인. 딱히 대의명분 없이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킬러 곤(장동건 분)은 인기척이 느껴진단 사실 하나만으로 문을 열어 확인해볼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고 냅다 총알을 꽂습니다. 그리고 그가 문을 열었을 때 가슴에 피를 흘리고 우뚝 선 소녀 하나.

 

 

 

전쟁 영화를 보면서 주인공이 아닌 엑스트라의 죽음에 눈물 흘리는 사람이 드문 것처럼, 곤이 사내를 죽일 때만 하더라도 그는 그저 독립된 빚쟁이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우발적 살인으로 처참하게 죽어가는 소녀를 발견했을 때 그들의 죽음은 개인의 것이 아닌 가족의 비극으로 인식되게 됩니다. 그래서 곤은 피폐해지죠.

 

그럼에도 조직은 일가족 몰살을 명합니다. 고의로 죽인 아버지. 실수로 죽인 소녀. 거기다 남은 어머니까지 제거하라는 거죠. 새삼스러울 것도 없습니다. 이게 늘 곤이 하던 일이니까요. 그럼에도 그는 소녀의 죽음이라는 에피소드. 그리고 애수와 증오가 깃든 특수한 환경 때문에 그가 이제껏 해왔던 일에 진한 피로를 느끼게 됩니다.

 

 

 

교포 곤은 어쩐지 모국에 정나미가 떨어진 채로 수십 년 만에 대한민국의 땅을 밟습니다. 소녀의 어머니, 모경을 죽여야 한다는 임무를 안고서요. 여자를 죽일 기회가 더러 있었음에도 불구 어쩐 일인지 그는 망설입니다. 여자의 존재에 동요한 탓인지 휴대 전화를 무음으로 해두지 않은 초보적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고요.

 

겉만 봐서는 그저 세련된 파티복의 성공한 여자. 프로젝트를 성사하고 냉랭한 어조로 회의를 이끄는 그녀의 모습에서 죽은 아이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곤은 미묘하게 심장을 찌르는 이 여자의 심리를 뒤쫓습니다. 화려한 커리어우먼의 이면에 치매 어머니를 봉양하는 가족의 의무감. 병실을 채우는 마리아의 목소리. 성공한 여자 모경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불안정한 시선으로 속죄하듯 흥얼거린 대니보이.

 

 

 

죽은 아이를 그리워하다 자살을 기도한 그녀는 어쩐 일인지 곤의 어머니를 연상하게 해서 쉽사리 총을 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들여다본 곤의 유년은 엄마에게 버림받는 공포로 얼룩져 있더군요. 그건 배고픔이나 목마름보다 더 사무치는 고통이었죠.

 

곤은 승진 욕과 돈 때문에 미국행의 아이를 쫓아가지 않은 모경(김민희 분)에 어머니를 투영하여 원망과 환멸로 물들여져 있던 지난날을 돌이켜 봅니다. 그토록 모질게 나를 밀어내던 어머니가 돌아선 길목에선 저 여자처럼 자책하며 울먹이진 않았을까. 아이의 유품을 내다 버리라고 히스테리를 부리더니 어느새 비디오에 기록된 딸의 모습을 애타게 갈구하며 울고 있는 걸요. 곤은 성공의 끝에서 여자가 흥얼대던 대니보이가 역시나 인파를 둘러싸고 같은 노래를 부르던 딸을 추억하는 키워드라는 사실에 그만 무너져 내립니다.

 

 

 

곤은 대니보이에 서린 유년의 애수와 그리움을 떨쳐내기 위해 귀를 막은 채 킬러의 손으로 방아쇠를 당겨 보지만 그것은 코를 찌르다 곧 그리워지는 매실주처럼 쉽사리 지워지지가 않는 향기였습니다. 그의 나이만큼 숙성되었을 모국의 매실주를 받아들이면서 어느새 곤은 모경, 아니 그의 어머니를 속죄합니다.

 

이처럼 대략의 줄거리로는 설명되지 않을 길고 긴 사연과 동기부여로 영화는 킬러 곤의 심경 변화를 설득하려 합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우는 남자에 비하면 불친절하다고 할 수 있을 레옹이나 아저씨의 설득력보다도 우는 남자의 그것이 훨씬 떨어진다는 점입니다. 관객은 영화를 보는 내내 도대체 곤이 왜 그토록 모경에게 집착하는지를 사고해야 합니다. 영화가 제시한 장문의 설명들은 도리어 관객이 풀어 헤쳐야 할 고단한 숙제처럼 느껴집니다. 액션 영화의 미덕인 시원시원한 쾌감은 온데간데없고 도리어 묵직한 피로감만 잔상으로 남습니다.

 

 

 

관객이 곤의 심리에 공감할 수 없는 까닭은 곧 이 영화가 불만족스러운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연에 집착하면서 정작 곤과 모경의 교감에는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 쾌감이 느껴지지 않는 무의미한 액션, 그리고 곤과 모경의 관계만큼이나 부조화였던 관객과 장동건의 소통의 부재. 이 모든 문제를 아우르는 원인에는 애석하게도 배우 장동건의 아쉬운 캐릭터 해석력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장동건이 연출한 ‘곤’은 단편적으로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인물인지를 파악하기 어려운 캐릭터입니다. 어사무사하게 신비롭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부여받은 모든 클리셰가 어설프기 때문이죠. 그래서 곤은 무언가 마무리가 덜 된 미완성의 캐릭터 같습니다. 감독은 지나치게 잘생긴 배우 장동건의 뜻밖의 귀여움을 팬서비스하기 위함인지 아침 드라마 해프닝처럼 물을 게워내지 않나 토사물을 잔뜩 묻힌 망가진 얼굴에 세상 다 산 사람처럼 위험한 도박 같은 장난을 치게 지시합니다. 그러나 정작 장동건은 느끼하고 부담스러운 액션을 담백하고 자연스럽게 소화해낼 수 있는 역량이 없죠. 그래서 곤의 장난과 심드렁한 행동거지는 배우 장동건의 실패한 개인기로밖에 느껴지지 않습니다.

 

 

 

 

레옹이 마틸다를, 차태식이 소미를 놓을 수 없는 이유. 일평생 누구도 하지 못한 것을 이 아이들은 해냈기 때문에. 메마른 대지의 소나기나 터널을 뚫은 빛. 아무도 침범하지 못할 일대일의 교감이 선사한 이 선명한 동기부여를 대신한 우는 남자 속 곤의 트라우마는 정작 최모경과 곤의 관계에 놓인 보이지 않는 벽이 되어버렸습니다. 곤이 모경을 지키려 하는 까닭은 우는 여자에게 자신의 친모를 투영했기 때문입니다. 이건 곤과 모경만의 맨투맨이 아니죠. 레옹 클리셰 특유의 소녀와 아저씨의 특별한 교감. 그 일생에 한 번 뿐일 인연의 압도적 폭발력이 별반 와 닿지 않습니다. 적어도 영화에서 그려내는 곤의 모경은 대체할 수 없는 특별한 인연이 아닌 엄마의 대리인이었으니까요.

 

최모경과의 통화에서 곤은 잔뜩 으스대는 비아냥 조의 목소리로 그녀를 조롱합니다. 여자의 아이를 죽인 죄인이라서. 정 대신 살의를 느끼게 하려는 의도였겠지요. 그러나 정작 정이 떨어진 것은 최모경이 아니라 관객이었죠. 숨은 의도를 파악하기도 싫을 만큼 어설프게 비열하고 뻔뻔한 목소리. 저는 97년도 영화 패자부활전을 참 재밌게 봤었는데 장동건의 깐족거림과 나르시시즘. 그리고 비열한 연기는 차라리 이때가 더 나았습니다.

 

 

 

우는 남자에서는 액션이 정말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많이 나오기만 합니다. 그리고 장동건의 액션이 아저씨의 원빈처럼 그리 폼 나지가 않습니다. 위험한 장애물을 뛰어넘을 때, 잔인하게 적을 처리할 때 등. 무서워서 혹은 미안해서 멈칫하고 주저하는 망설임이 느껴집니다. 그건 바로 장동건이 선량하게 살아왔다는 증거가 되겠지만, 에이스 킬러 곤의 정체성과는 부합하지 않는 실책이었죠.

 

굉장히 애를 쓴 작품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우는 남자라는 신파조 제목의 선입견과는 달리 뜻밖의 감상적인 장면의 단상이 마음을 아릿하게 저리기도 했고요. 매실주와 대니 보이 그리고 종이학 등의 키워드 같은 디테일. 마치 아이의 성장비디오를 보는 아빠처럼 연출된 미니 빔의 공간. 천장에 일렁이는 모경의 딸과 곤의 애수 어린 눈빛은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동건의 연기이기도 했습니다. 덧붙여 그것은 이 영화가 구구절절한 설명보다는 함축된 이미지 나열에 더 설득력이 실렸다는 점. 배우 장동건의 역량은 로맨스나 남자 이야기보다는 따뜻함이 서린 인류애 쪽이 더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것이라는 단서를 남겨두기도 합니다.

 

 

 

서른네 살의 원빈은 청춘을 붙잡아 발버둥 치고 싶을 나이에 과감하게 ‘아저씨’가 되어주었습니다. 성인 남녀의 로맨스가 아닌 유사 가족의 특별한 교감으로 원빈에게 기대하는 사랑의 범위는 더욱 포괄적이고 능동적인 것이 되었죠. 그것이 청춘스타 원빈이 무너뜨린 벽입니다. 아저씨가 아닌 우는 남자에서 남자의 이상향이자 여성의 이상형인 미남 배우 장동건의 넘지 못한 벽을 바라봅니다. 우는 남자가 아저씨가 되지 못했던 것. 그것은 비단 장동건이 원빈을 뛰어넘지 못해서만은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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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를 위하여, 이태임의 노출이 아깝다. 조폭 코미디보다 황당무계한 느와르 

- 황제를 위하여, 두 남자가 가지 못한 신세계만이.

 

황제를 위하여장르액션, 느와르2014.06.11 개봉런닝타임 104분출연 이민기, 박성웅, 이태임, 김종구, 정흥채

 

대한민국 여성 관객을 붙들어 싫어하는 영화 형태를 묻는다면 열에 아홉은 ‘조폭 코미디물’이라고 말할 만큼 제대로 된 느와르의 이미지가 정착되지 않은 한국 영화사에 ‘신세계’나 ‘달콤한 인생’은 하나의 혁명과도 같았습니다. 특히 2012년 별안간 충무로에 낙화 된 신세계는 도리어 여성 관객의 취향에 완벽히 부합한,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세 번 보는 마니아의 심성을 자극하는 무엇이 있는 영화였습니다. 여성 관객을 이끄는 그 중독성은 일견 영화 ‘스타트렉’과도 닮아있었죠.

 

이렇듯 남녀 모두에게 ‘잘 만든 영화’라는 호평을 듣는 느와르물은 남자의 공감대보다도 여성의 심리를 자극한 브로맨스 요소를 담은 작품이 대부분입니다. 겉모습 그 자체만으로도 소유하고 싶은 블랙 재규어 같지만, 한편으로는 부서질 것처럼 위태로웠던 신세계의 이정재나 얼굴에 핏방울을 칠하고도 묘한 애수가 느껴졌던 달콤한 인생의 이병헌은 남자 관객에게는 동경을 여자 관객에게는 동정을 일으키는 캐릭터였죠. 영화 신세계의 인기 캐릭터는 황정민의 씨빠- 브라더였지만, 이 작품의 감수성을 사수한 일등 공신은 곧 이정재의 연약함이었습니다.

 

 

꼼꼼하게 여기저기 정장을 갖춰 입은 박성웅과 “나는 남자다!”를 이글이글 불태우는 이민기의 포스터를 보며 “아뿔싸!”라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황제를 위하여는 예상을 뛰어넘은 참혹한 영화였습니다. 이 작품은 범작 이상의 대단한 느와르 영화가 사수했던 여성 관객의 감수성을 건드리지 못한 것은 물론, 평범한 조폭 영화에서 남자들이 기대할 그 무엇의 희열도 빠져있습니다. 그렇다고 조폭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 리얼리즘 영화라기엔 작품의 부실한 개연성과 터무니없는 연결 고리들, 게다가 이민기라는 순정 만화 같은 캐릭터가 너무나도 이질적입니다.

 

 

 

애석한 말이지만 이민기는 남자의 이상향이 아닙니다. 여전히 소년 같은 얼굴의 이민기를 여성 관객을 잡을 출사표로 내던지지 않고 도리어 여심을 져버린 개망나니로 만들어버린 감독의 의중을 저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나도 비효율적인 인사 배치라고 생각했어요. 이 영화의 이민기는 역시나 여성 관객에게 참 폭력적이었던 영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처럼 여심을 져버린 인물입니다.

 

 

네. 황제를 위하여는 뒷세계판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같은 영화입니다. 가진 것 없는 신출내기가 돈맛을 알게 된 이후 계속 위로 올라가고 싶어 발버둥을 치다 날개 없이 추락하는. 거기다 조폭 캐릭터 특유의 닳고 닳은 레퍼토리가 참 뻔뻔하게 나머지 전개를 메웁니다. 갖고 싶은 화류계 여성. 명예욕과 어울리지 않는 순정이 빚어낸 반항심. 결국, 키워준 형님의 등에 칼을 꽂네! 마네하다 남자들의 진한 의리 한판으로 마무리하는 너무나도 전형적인 쌍팔년도식 조폭물이죠.

 

 

 

뼈대를 이끄는 이야기가 단순하다 해도 등장인물의 입체적인 감정 노선과 캐릭터 간의 숨 막히는 애정 전선이 그 사이를 메꾼다면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이 영화 역시 제대로 요리하면 맛있어질 수 있었을 재료가 적지 않게 있었고요. 하지만 주인공 이환(이민기 분)의 열망은 딱히 관객의 가슴을 자극하지 못합니다. 영화가 내세운 주요 감정 노선은, 이환에게서 리플리의 단상을. 이환과 상하(박성웅 분)의 관계에 달콤한 인생 속 이병헌-김영철의 구도를 기대한 것 같습니다만 겉핥기 이상의 무엇도 되지 않았습니다.

 

 

 

일단 이민기의 갈등에 공감할 수가 없으니, 웅장한 음악과 요란한 연출이 불필요한 장치로 받아들여집니다. 이 영화가 승부 요인으로 내건 ‘이태임 노출씬’ 또한 안타까운 사족이 되어버렸습니다. 파격적 정사 장면에 어마무지한 음악을 틀어대곤 “나 지금 심각해.”를 온몸으로 외쳐대는데 사랑을 나눈다기보다는 이건 폭력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더군요.

 

 

 

이민기와 박성웅의 관계에서 그 무엇의 감동도 느낄 수 없으니, 영화가 잘 되었더라면 유행어가 되었을지도 모를, “동정을 버리면 동경을 얻는다.” 또한, 허세로만 와 닿을 뿐이었습니다. 투박하고 일차원적인 이 영화의 만듦새는 남녀의 사랑보다 집착적이고 애틋한 남남 로맨스의 미묘한 기류를 감당해내지 못합니다. 이병헌이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보스를 향해 외치던 “말해 봐요. 도대체 나한테 왜 그랬어요?” 에 담긴 두 사람간의 수많은 애증의 역사를, 박성웅-이민기라는 좋은 모델을 기용해놓고도 제대로 써먹지 못하는 이 영화에 통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더군다나 그만큼의 볼거리조차 없으니 남성 관객의 “나도 저렇게 한번 살아보고 싶다.”는 판타지를 충족시켜주지도 못합니다. 같은 선혈 낭자 씬이라도 킬빌이나 달콤한 인생의 핏빛조차 비주얼로 만들어버린 미학적 가치는 존재하지 않고 그저 끔찍하게 폭력적이기만 합니다. 내내 떫은 감을 씹은 얼굴이 되어 “참 아프겠다.”고 읊조리고 있으니. 아무리 그래도 이런 감상을 바라고 만든 액션은 아니겠지요.

 

 

 

 

 

비주얼과 스토리 그 무엇에도 만족하지 못했던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흥미로웠던 부분은 그것도 영화 외부에서 비롯된 것이었는데, 신세계에서 그토록 황정민을 괴롭히던 망나니 동생 박성웅이, 형님의 유지를 물려받아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는, 의리의리(으리으리)한 사나이로 돌아왔다는 것. 마치 너도 당해보라는 듯 개망나니 부하 이민기가 신세계의 박성웅을 빼다 박았다는 부질없는 재미가, 이 뻔하고 흔한 영화의 유일하게 신선한 즐거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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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간다, 포스터에 속으면 안 되는 영리한 액션 영화

- 끝까지 간다 영화 후기

 

끝까지 간다 (A Hard Day, 2013)장르액션2014.05.29 개봉런닝타임 111분출연 이선균, 조진웅, 신정근, 정만식, 신동미

 

-글 후반부 영화의 결말을 짐작할 수 있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인상이 전부를 결정한다는 사람도 있지만, 영화 포스터의 경우는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습니다. 그저 이선균 캐스팅 외엔 내세울 것이 없다는 듯 찡그린 얼굴로 가죽 코트를 입은 그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한숨부터 나오죠. 저질 유머와 감정 과잉. 포스터만 봐도 참 넘친다 싶거든요. 하지만 직접 감상한 이 영화의 강점은 과잉이 아닌 절제에 있었습니다. 후유증이 남지 않는 매운 음식을 먹은 듯 끝까지 간다는 상당히 산뜻하며 또한 영민한 액션 영화입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이 영화의 주인공 고건수는 마치 이방인의 뫼르소 같은 남자입니다. 아니 본의 아니게 뫼르소의 심리에 체험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더 정확하겠군요. 어머니의 장례식 날에 그가 한 행동은 도무지 상을 당한 사람의 그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작부터 장례를 내팽개쳐두고 비자금을 감추기 위해 달리는 남자, 고건수는 폭력적으로 운전하다 사람을 치고 트렁크에 시체를 유기하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경찰입니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점은 선악 구도의 모호함입니다. 선한 사람, 악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나쁜 놈과 나쁜 놈, 그리고 또 나쁜 놈이 정의감이나 거창한 대의명분이 아닌 그저 살기 위해 싸운다는 사실이 참 재밌습니다. 분명 고건수는 경찰서 서랍에 비자금을 자물쇠로 채워둔 비리 경찰이자 뺑소니범에 그 시체를 유기하여 어머니의 관속에 같이 매장한 희대의 패륜아이지만 그럼에도 묘하게 보통 사람처럼 느껴진다는 사실이 또한 재밌는 부분입니다.

 

 

 

웬만한 부조리도 보통 사람에게 있을 법한 두 얼굴처럼 그려내는 이선균의 넉살과 인간미를 고건수라는 캐릭터 속에 적절히 녹여낸 감독의 재량만큼이나 뜻밖에 날씬한 악마를 표현하는 조진웅의 변신 또한 기대 이상의 만족감을 줍니다. 좋은 목소리에 깐죽대는 말투가 마치 올드보이의 유지태를 떠올리게 하지만 실상은 곰처럼 거대한 몸을 가진 남자라는 사실이 유쾌하달까요.

 

 

 

 

둔탁할 것 같지만 스마트한 조진웅처럼 군더더기 없이 매끈한 흐름으로 전개되는 이 영화는 습도가 느껴지지 않는 더위처럼 끈끈함 없는 쾌감으로 관객을 사로잡습니다. 거북하지 않은 유머와 농담 같은 아이디어가 무겁고 암울해야 할 시체 쟁탈전을 웃음으로 마감하지만, 관객을 한껏 안심시켜놓고선 한순간에 그 희망을 빼앗아 가버리는 단호함에선 이 영화가 스릴러 부문에서도 만점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죠.

 

 

 

집채만 한 스케일의 할리우드 무비를 즐기는 맛도 쏠쏠하지만 한정된 공간을 살뜰하게 사용한 액션 영화 쪽이 더 취향인 저로서는 주변의 사물과 소소한 아이디어로 위기를 파헤쳐나가는 끝까지 간다의 액션과 위기 해결 방식이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온도 조절이 엉망인 샤워기에 투덜거리는 여동생의 목소리를 전조로 깔아놓고 그걸 고스란히 무기로 활용하는 깜찍함이라니!

 

 

 

부패 경찰 고건수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더니 영화는 시종일관 비리가 당연시된 경찰 세계를 차디찬 조소로 힐난합니다. 경찰의 슬로건을 공격적으로 비웃기도 하고요. “아니 뭐 검찰은 경찰 아니야? 대한민국 경찰을 믿어보자고!” 아무리 주인공이라지만 뺑소니에 시체 유기, 살인 등. 연거푸 범죄를 저지른 고건수를 “너까지 자리를 비우면 남은 경찰이 없다.”며 만류하는 책임자의 한마디는 황망하기까지 합니다.

 

 

영화 말미에 고건수가 발견한 어마어마한 단위의 그것은 정년퇴직을 꿈꾸었던 고건수에게 있어 경찰직을 그만두면 생길 유일한 고민마저 차단하려는 몸짓 같아 귀엽기까지 합니다. 이거 줄 테니 너 절대로 거기 다시 들어가지 마! 라는 것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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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흥미로운 소개네요. 요즘 영화를 잘 안 보게 되는데 왠지 좀 당깁니다.
    마침 주말이니 극장이나 가볼까요? ㅎㅎ

    • 스릴과 유머가 사회 비판 메시지 사이에 스며들어 있어서 상당히 맘에 드실 것 같아요. 탁발님의 리뷰가 기대돼요! 조진웅과 이선균의 연기합도 참 좋고요. 영화를 보는 내내 이 감독님의 차기작을 고대하게 되더라고요.^^

  • 안녕하세요.

    '끝까지 간다'는 전반부는 걸작인데,후반에 갑자기 무너졌요.

    이런 경우는 대개 감독이 바뀌는 경우가 비일비재한데...

    (한석규의'눈에는 눈 이에는 이'(안권태/곽경택 공동 감독)에서 투자자들이 안권태 감독을 믿지 못해서 곽경택 감독 투입하여 액션 장면을 재촬영하여 문제가 발생해죠...투자자들의 영화 간섭으로
    그래서 안권태 감독이 도중 하차 하고, 감독에서 빼달라고 요구해죠.)

    그래서 영화 정보를 보고 나서 '아 역시...'

    (장항준/이해준 각색.-각색을 하는 경우가 대개 영화에서 연출이 목적으로...)

    처음 의도는 이해준 감독과 장항준 작가가 블랙 코미디로 시나리오를 각색했는데,

    투자문제('김수로/이선균의 '잔혹한 출근'-흥행 참패)- 투자자들이 블랙코메디는 흥행이 되지 않는다라는

    생각에 전체 내용은 '장항준'이 각색한 시나리오를 이해준 감독이 전반부 드라마 부분을,김성훈 감독에게 후반부액션부분을 맡기로 하고 투자가 결정된 것 같아요..


    -전반부 촬영/조명과 후반부 촬영/조명이 갑자기 바뀌고,내용도 액션 위주로..
    -투자자들은 흥행이 안되는 '블랙코메디물'보다는 '액션물'로 포장
    하고 싶은 욕망이 앞서죠...
    -후반부는 크랭크인 후 '최종병기 활' 제작사 스텝이 재촬영아니면 A팀,B팀으로 나누어서 촬영하여 편집.....
    (그런 조잡한 편집은 처음 경험해요...)

    -관례적으로 재촬영한 감독아니면 제작사 요청으로 크레딧에 올라가는 경우가 많아요.(처음 감독은 대개 각색으로 이동)

    -이선균이 차에서 잠을 깨는 장면부터....
    (조진웅이 순경(반전)으로 나오다가 뜬금없이 경찰서에서 이선균를 구타하는 장면 시점이 감독 교체..)

    그리고 이선균 인터뷰 내용에서도....

    “이해준 감독에게 전화를 받고 이 시나리오를 봤어요. 몰입도 잘 되고 구성도 독특하고 단번에 쭉 읽었어요. 궁지에 몰렸지만 표현의 여지가 있는 이 인물을 꼭 해보고 싶었죠. 게다가 액션을 도전해 본 경험이 없어 더 끌렸어요. 또 투자가 되는지도 봤죠. 하하. 그것도 중요한 거니까.” -이선균 인터뷰 내용중-

    한국 영화에 블랙 코메디의 걸작이 나오는 순간인데,,돈이 뭐길래...

    그래도 이해준 감독하고 장항준 작가의 재기 가능성은 매우 높다는 희망이 있다는 점은

    '끝까지 간다'의 미덕이라고 생각했요...

    간단하게 하면,

    전반부는 '이해준 감독/각색,장항준 각색'에서 후반부는 김성훈 감독/각본(액션), 이해준-장항준 각색으로...

 

개봉하지도 않은 영화의 결말을 유출하고 싶어 하는 감독은 없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를 소재로 한 작품은 필연적인 딜레마를 가진 것이나 다름없죠. 관람석을 채운 저 많은 사람은 하나같이 미리 스포일러를 유출 당한 상태일 테니까요.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영화로 재생산하는 힘은 결말까지 이르는 과정에 담은 21세기의 해석일 테죠.

 

영화 ‘역린’은 1777년의 여름에 일어난 24시간의 정조 암살 사건, ‘정유역변’을 두 시간으로 압축한 역사극입니다. 그리고 ‘다모’와 ‘베토벤 바이러스’와 ‘더킹 투하츠’로 친숙해진 유명 드라마 PD, 이재규 감독의 두 번째 스크린 도전작이기도 합니다. 퓨전 사극 다모를 통해 시청자에게 그 이름을 각인시켰던 만큼 데뷔작이나 다름없는 역사극 역린의 장르가 사무치게 다가옵니다.

 

 

 

영화감독의 브라운관 입성은 어쩐지 고수의 도움을 받는 느낌이지만 드라마 감독의 스크린 데뷔는 도리어 그 경력이 장애가 됩니다. 시작부터 선입견이라는 핸디캡을 깔고 가야 했던 이재규 감독은 마치 그 분풀이인 양 영화 대부분의 구성을 생소함으로 채워 넣었습니다. 마치 이 영화의 주제나 미션이 선입견 파괴라도 되는 듯이요.

 

역린의 주연 현빈은 적지 않은 영화를 찍었지만 아직은 드라마 스타로 더 익숙한 배우입니다. 심지어 사극은 그에게 있어 첫 도전이었죠. 어디 그뿐인가요. 정재영, 조정석, 조재현, 한지민. 개봉 전부터 관심을 끈 이 화려한 캐스팅의 대 주제는 분명 도전과 실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멤버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스크린이 아닌 안방극장에서 더 친숙한 배우이거나 사극에서의 역할을 기대하는 배우는 아니거나 적어도 맡은 역할의 성격이 관객의 기대치를 뛰어넘는 캐스팅이거나. 조정석에게서 오로지 살육자의 쓰임새로 길러진 냉혹한 살수의 역할이나 한지민에게서 치명적인 팜므파탈의 이미지를 기대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요. 이 무모하리만큼 생소한, 선입견으로 둘러싸인 캐스팅은 일견 영화 역린의 주제 의식과도 닮았습니다. 왕의 자격을 인정받지 못했던 아버지. 종국에는 선대왕에게 버림당해 뒤주에 갇혀 죽어야만 했던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를 향한 외경심. 그는 왕의 그릇이 아니라는 선입견.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1776년 3월 10일, 그가 즉위 당일 내뱉은 윤음의 첫머리는 자리의 모두를 얼어붙게 했습니다.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嗚呼, 寡人思悼世子之子也. 정조 즉위년(1776) 3월 10일)” 조선왕조의 22대 국왕이 언터처블이나 다름없었을 사라진 그 이름을 상기했기 때문이죠. 나는 그의 핏줄이며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겠노라고. 그 핏발 서린 첫마디는 사형선고이자 전쟁선포나 다름없었습니다. 그 자리를 차지한 신하의 대부분은 왕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에 깊이 관련되어 있었으니까요. 영화 역린에서 현빈의 멋진 목소리로 시작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는 정조 암살 계획의 계기가 되는 이른바 판도라의 열쇠였던 겁니다.

 

용의 턱밑에 난 거꾸로 된 비늘을 뜻한다는 역린. 이를 건드리면 용이 크게 노하여 화를 입는다는 뜻을 왜 이 영화의 제목으로 붙였을까요. 역사가 아닌 영화의 내용만으로 미루어 짐작해볼 때 온순한 용의 심기를 건드린 이는 다름 아닌 정조의 어린 할머니, 정순왕후입니다. 마치 장미 꽃봉오리처럼 어리고 아름답지만, 치명적인 가시를 지닌 그녀는 손자를 왕으로서 대우해주지 않고 희롱하거나 위협합니다. 한마디로 왕을 귀여워하다 못해 그의 턱 아래 수염을 잡아 비틀어버린 거죠. 이 어려운 과제를 맡은 이가 바로 한지민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마치 도전과제처럼 배치된 이 캐스팅에서 분명 배우들은 온 힘을 기울여 발버둥 쳤습니다. 선입견이라는 늪을 빠져나가기 위해. 하지만 그 수심은 워낙 깊고 끈적거려서 웬만큼 대단하지 않고서야 벗어나기 어렵죠. 애석하게도 대다수의 배우는 그 선입견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단호하게는 현빈 외엔 누구도 그 틀을 깨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중에서도 한지민의 연기는 그녀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만치 심각했습니다.

 

 

 

 

 

역린을 보면서 내내 아쉬웠던 점은 캐릭터 만들기에 치중한 나머지 지나치게 작위적인 대사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특히 치명적인 요부라는 캐릭터를 위해 한지민에게 부여한 대사와 그것을 완성한 한지민의 대사 소화력은 어색함의 극치였습니다.

 

특히 한지민은 대사 하나하나에 비슷한 운율과 톤으로 일종의 패턴을 만들어 대화하는데 “사람이 잠은 자야죠?” “주상에게 변고가 생기면 내가 힘들어져요.” “다쳐요.” “어려워요.” 등 단어 중간마다 쉼표를 넣고 끊어 말하기, 느릿느릿했다가 느닷없이 다급해지는 리듬이 영화의 대사가 아닌 개그 프로의 유행어 만들기나 다름 없어 보였습니다. 그것도 개그콘서트가 아닌 웃찾사 같았죠. 길티, 길티를 되풀이하는 조재현 씨의 대사 또한. 감독이 리얼리티를 중시했다면 이런 대사와 연기를 용납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빈 또한 초반엔 선입견에 의한 어색함이 느껴졌으나 역사와 판타지를 버무려서 나온 그의 캐릭터에 점차 녹아들어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재규 감독이 그의 멋을 위해 대부분의 신을 폼 나는 장면으로 채워준 공 또한 무시하지 못하고요. 현빈이 열연한 정조는 후반부의 한 장면을 제외하곤 결코 폼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따뜻하고 감성적이지만 어린 시절부터 암살 위협을 받아온 불운의 로열패밀리인 만큼 특유의 경계심과 적 앞의 단호함 또한 배우 현빈에게 발견한 새로운 연기 영역이었죠.

 

역린을 보면서 내내 중국 영화 조조-황제의 반란이 떠올랐습니다. 어린아이들을 납치, 감금해 키드 암살단을 조작하고 잔혹한 방식으로 살육을 가르쳐 최고이자 최악의 살수로 길러내는. 이 끔찍한 무리의 칼끝이 오로지 조조 한 사람을 향하며 그 중심에는 그의 권력에 위협을 느낀 황제의 공포가 깃들어져 있음을. 왕의 노한 심기를 의미하는 역린과 황제의 반란이라는 제목 또한 상응하는 바가 있지요.

 

 

 

영화 역린은 분명 선입견의 그늘을 완전히 벗어날 만큼의 완성도를 그려내진 못했습니다만 적어도 역사의 결말 위에서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만큼은 똑똑히 전달되는 작품이었습니다. 감독은 정조의 역린이 아닌 역사에 기록되지도 못할 역린의 불씨, 왕의 목을 노리는 자의 비애와 그 마음을 얻는 키워드에 주목합니다. 불을 태우기 위해 불쏘시개처럼 던져졌다가 진화되지 못하고 불티 되어 날리는 일회성의 생명들. 하지만 이런 그들에게도 마음과 끊고 싶지 않은 관계가 있었습니다.

 

살수의 홍수와 그를 지키려는 소수의 사람들. 한번 쓰임 당했다가 버려지고야 마는 불쏘시개 같은 운명을 가진 그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가치관이나 정의, 거창한 대의명분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바로 관계의 신뢰죠. 영화 속 정조가 상책에게 한 것. 갑수가 을수에게 전한 것. 신뢰를 학습한 이는 스스로 불쏘시개가 되는 일조차 마다치 않습니다. 이게 바로 작은 일이 감동이 되고 그것이 곧 기적이 되어 전한 희생이죠.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 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영화의 거대한 메시지가 된 중용 제23장은 선입견의 장벽 위에 서 있는 감독 자신이 관객과의 관계를 돌이켜 호소하고 싶은 거대한 마음속의 울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의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자료의 저작권은 해당 제작사와 신문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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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4

  • 2014.05.12 13:01

    비밀댓글입니다

  • 안녕하세요.

    내 가는 길
    올 바라야
    뒤따르는 후손들도
    그 길을 따라 오지 않으련지

    그 가는 길 험란하나
    내 그 길을 선택 하리라
    뉘 무어라 말을 하든
    그 길이 바로
    정도(正道)라면 말이다.

    -정조와 정순왕후의 재미난 사실들....

    정조(홍재 이산)의 정은 바를 정-바른 왕이고,정순 왕후의 뜻은 곧고 순수한 왕후라는...

    즉-바른 남자(호는 홍재-널리 몸과 마음을 깨끗한 남자)와 곧은 여자의 대결...

    그리고 더 재미있는 사실은 그 이름대로 살고 죽었다는 점...

    정조는 왕의 권위(숙청,과감한 정책)보다는 성리학의 정치 사상또는
    현빈을 닮은 얼굴로 올바른 정도(正道)의 성군..그래서 正祖

    정순 왕후는 오직 대의명분에 맞는 행동.....

    영조의 뜻 - 사도세자를 추숭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당부 -‘갑신처분’

    정조의 뜻 - 정조 사후-김조순(세도정치의 원조)의 딸을 세자빈으로 간택을 들어줌- 이 일은 가문이 멸망하는 것을 알면서도 들어줌.

    -> 김조순(세도정치)일족에 의해 정순왕후세력 숙청.

    정조 사후-내노비, 시노비 66,000여명을 해방 하고, 이 공을 정조의 업적으로 돌림.

    정조 사후 대리청정를 4년만 하고 순조에게 물려줌-5년를(왕의 나이 20세까지 대리청정 가능) 더 할 수 있는데,왕의 친정 관습에 따라
    순조 나이 15세에 대리청정 거둠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 팟캐스트 참조-
    '정조실록- 높은 이상과 빼어난 자질,그러나''

    -> 더 재미있는 사실은 사도세자 추존이 정조 사후 99년 후에 장조의황제로 추존... 정말 길다.

    그냥 저의 사견으로는

    굳이 '정유역변'를 배경으로 허구의 인물과 왜곡으로 진행하고,1일을 플래시백(Flashback)으로 조잡하게

    하는 것보다...

    정유역변을 앞에 놓고,정조 2년-노비행방 추진을 전개/갈등으로'은전군(恩全君) 추대 사건'를 절정

    에...

    그리고 결말에는 정순왕후가 정조 사후 내노비/사노비를 해방 하면서...

    플래시백(Flashback)으로 정조와 독대 자리에서 정조가 중용 제23장 이야기하면....

    그 메세지가 관객들에 거대한 마음속의 울림이 되지 않을까라는....

    저는 현빈의 정조와 한지민(다음 작품은 드라마로..)은 호이지만,

    감독은 불입니다.

    이재규 감독이 드라마(더킹 투하츠)를 PPL천국(드라마 제목도 PPL)으로 만든 이 만행은 용서가 안됩니다.

    또 한지민을 이렇게 만든 만행도 용서가 안됨...

    P.S - 한지민은 정조 시대 배경으로 '역린'까지 3편이 있습니다.

    드라마 '이산'

    영화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

    정조 시대 전문 배우....










  • 2014.05.13 10:01

    비밀댓글입니다

 

2002년 혜성처럼 등장한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은 혁신적인 작품이었습니다. 버스 안에서 좋아하는 여자애에게 고백할까 말까를 망설이다 반 친구들에게 망신을 당하는 초라하고 왜소한 몸매의 어린 소년이 우리의 영웅이라니. 그는 억만장자도 아니었고 대단한 미남도 아니었습니다. 주변에서 흔히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눈에 띄지도 않을 작달막한 히어로. 이 영화는 히어로 무비라기보다는 사회 고발성 메시지를 담은 다큐멘터리와도 같아 보였죠.

 

그랬기 때문에 2012년에 리부트한 마크 웹 감독의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은 필연적으로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이 바이블이 되어버린 이상 관객을 실망하게 하지 않으려면 그의 작품을 복제하는 방법밖에 없었을 테니까요. 문제는 샘 레이미의 피터파커가 원작인 코믹스판과 닮아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아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분명 그는 아빠에게 버림받고 삼촌을 잃은 전 재산 730원의 푸어 피터파커지만 그럼에도 매사 유머 감각을 잃지 않고 발랄하면서도 치기 어린 10대 소년의 감성을 그대로 갖고 있었어요. 영화 '500일의 썸머'로 감성 로맨스의 정점을 찍은 마크 웹 감독은 이 초인 영웅의 원점이 결국은 10대 소년이라는 사실에 주목했던 것 같습니다. 아련하고 감성적이며 치기 어리고 혈기왕성에 불안정한. 그러니 샘 레이미의 손으로 우울하디 우울해진 피터 파커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하이틴 무비 같은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이 성에 찰리가 없었죠. 그럼에도 저는 샘 레이미의 피터 파커가 아닌 마크 웹의 스파이디와 앤드류 가필드의 피터 파커를 몇 배는 더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스파이더맨만이 이토록 불안하면서 사랑스러운 소년 히어로의 희소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이런 히어로는 피터 파커 밖에 없으니까요. 영웅 수트 위에 백팩을 멘 히어로라니.

 

마크 웹은 정말이지 디테일을 사랑하는 감독인 것 같습니다. 조금만 관심을 두고 들여다보면,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은 "뭘 이런 걸 다."라는 생각이 들 만큼 요소요소 파먹을 것이 참 많아요. 마크웹의 유머와 감성, 앤드류 가필드의 열정과 섬세함. 두 사람의 협연이 만들어낸 디테일이 바로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입니다. 그래서 디테일을 파면 팔수록 재미있는 영화가 또한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이죠. 만약에 어메이징 스파이더맨1에서 악당 리자드 박사를 잡기 위해 하수구에 거미줄을 쳐놓곤 그걸 해먹 삼아 누워 똑딱똑딱 핑퐁 게임을 즐기던 그의 모습에 사무치는 사랑스러움을 느끼셨다면 제 말을 충분히 공감하실 겁니다.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에서도 오늘도 뉴욕을 지키느라 느지막이 졸업식에 도착한 피터파커가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고 단상 위에 서는데 파란색 졸업 가운 위에 멘 까만 백팩을 보며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죠.

 

 

 

스파이더맨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유머감각을 고스란히 재연한 마크 웹의 스파이디는 2에서 보다 본격적으로 흥겨워집니다. 전편에서 코너스 박사에게 코너에 몰릴 만큼 린치를 당하는데도 시종일관 쫑알거리며 몸과 입을 동시에 놀려 싸우던 이 친구. 혈기 왕성한 10대 소년의 에너지에 이제 본격적으로 무르익은 스파이더맨으로서의 자신감까지 합산되어 절정의 유머를 들려주는데요. "굳모닝. 뉴욕. 오늘은 뭐가 문제야?" 히어로 중에서는 드물게 경찰과 유대 관계가 좋은 스파이디가 뉴욕 상공을 비행하며 오늘의 일정을 전해 듣고 줄과 줄을 연결해 달리는 범죄자의 차를 노크하며 깐족대는 모습이 히어로라기보다는 예능 프로그램의 사회자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특히 타임스퀘어에서 설계도를 가진 남자 맥스가 아닌, 악당 일렉트로와 첫 대면을 하는 씬은 이 영화의 백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장면인데요. 마치 관객을 주변에 두른 무대 위의 주인공 같은 두 사람. 뭔가 테마송부터가 자조적인 느낌의 악당 일렉트로는 모노드라마에서 방백을 하는 연극배우 같고 이런 그를 반대편에서 거미 포즈로 바라보며 "어이! 스팽글! (반짝이)"이라고 호명하는 차 위의 스파이디는 마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의 MC 같죠.

 

 

 

마크 웹의 유머는 귀엽기 그지없어서 사랑스럽다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재주가 있어요. 전기 인간의 전류 공격에 특유의 웹슈터 - 거미줄이 뿜어 나오는 손목의 비밀 장치 - 가 파괴되자 유튜브로 과학 채널을 시청하며 배터리 증폭 실험을 하는데 그 장면이 마치 하이틴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상큼합니다. 심지어 화재가 일어나자 보호 장비를 단단히 하곤 멀찌감치 서서 소화기로 불을 끄는데 잠시 침묵이 흐르곤 다시 소화기로 꺼진 불을 재점검하는 모습이 무척 귀여워서 절로 웃음이 터지죠.

 

전날 밤 서로 다른 이유로 밤을 새운 해리 오스본의 전화가 걸려왔을 때 천장에 붙은 피터 파커가 잠결에 실수로 뻗은 거미줄이 전화기가 아닌 무거운 공구를 집어 들어 "으악!" 하고 비명을 지르는 장면에선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터지더군요. 스파이더맨 얼굴을 하고 졸업 가운을 입은 피터파커를 혼자서 발견한 스파이더맨의 원작자 스탠 리가 "어! 내가 아는 얼굴인데."라고 흥분하는 장면 또한 유머의 포인트. 그는 전작에서도 코너스 박사와 스파이디가 싸우는 그림을 배경으로 클래식 음악을 틀어 웃음을 안겨줬던 전력이 있죠. 한편 피터 파커의 휴대폰 벨 소리가 바로 올드 스파이더맨의 주제가라는 사실 또한 귀여운 디테일입니다.

 

 

 

토비 스파이디의 알아서 생겨난 거미줄 장치와 달리 과학도의 능력을 여실히 발휘해 스스로 웹슈터를 만드는, 원작과 충실한 설정을 무척이나 흥미롭게 지켜봤던 저에겐 이 장면이 그저 반가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렉트로의 공격에 시내가 초토화되고 모두들 스파이더맨을 찾을 때 소방관 모자를 쓰고 나타난 스파이디가 물로 전기 인간을 진화하는 장면도 몸서리쳐지게 귀여웠지만 마치 예능 프로그램을 진행하듯 소방관 아저씨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하며 손바닥을 맞부딪히는 부분에선 정말 이런 재미를 스파이더맨 아니면 어디서 보겠나 싶더라고요.

 

어메이징 스파이더맨2에서 탄성이 절로 나왔던 부분이 바로 뛰어난 음향 효과입니다. 영화 음악의 거장 한스 짐머가 담당한 이 영화의 음악은 마지 리듬 게임처럼 영상을 소리로 구현해 생동감이 넘쳐납니다. 특히 일렉트로의 테마곡은 소리만으로도 전류가 짜릿짜릿하게 전달될 만큼 대단히 입체적이면서도 또한 그의 본연의 생김새인 외톨이 유령, 맥스의 자조적이면서도 희극적인 이미지를 그대로 재연해 한스짐머가 이 캐릭터에 연민을 느꼈을까라는 생각이 들게끔 하더군요. 일렉트로와 스파이더맨이 대결하는 장면에선 두 사람의 액션 이상으로 음악과 음악이 맞붙는 느낌이 기가 막힙니다. 자신의 테마송을 틀어놓고 전광판에 비친 본인의 얼굴과 타인의 관심에 빠져서 웅얼대던 일렉트로.(I'm Electro) 관심을 스파이디에게 빼앗겨버리자 솟구친 분노(my enemy)로 전류 공격을 강행하는 그를 스파이더맨은 터진 웹슈터의 반대편으로 아슬아슬하게 제압하는데요.

 

 

 

전류가 흐르는 난간을 본능에 따라 잡으려는 행인들을 슬로우모션으로 캐치하고선 한쪽만 남은 거미줄로 통구이가 될 뻔한 그들을 구해내는 장면은 압권이라 말할 수 있죠. 이후 스파이더맨은 기계 체조 선수처럼 계단 맨 위에 올라앉아 링 위의 슈퍼스타 같은 모습으로 일렉트로에게 으르렁대는데 음악 또한 일렉트로의 주제(아임 일렉트로, 일렉트로 믹스)에서 스파이더맨으로 바뀌는 것이 몹시나 흥미롭습니다. 이때 흘러나온 OST의 제목이 바로 I'm Spider-Man이니까요.

 

 

 

어메이징 스파이더맨2의 음악이 뛰어난 것은 스파이더맨의 상징인 유머와 장난이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정신과 실험실에 갇힌 일렉트로를 물속에서 끌어 올리는 카프카 박사. 변태적인 행위와 어울리지 않게 클래식 음악을 듣고 있습니다. 일렉트로의 음악은 전반적으로 아이러니와 희극적 요소를 기반으로 하는데 그의 푸른 몸뚱이를 물에서 끌어 올리며 울려 퍼진 음악이 하필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이예요. 일렉트로와 최후의 싸움에서 전기를 마음껏 조종할 수 있는 그가 마치 이퀄라이저처럼 빌딩에 불을 밝히며 스파이더맨의 부딪히는 타격음을 비트로 활용하여 음악을 만드는데 이때 스파이더맨이 던진 한마디. "나 이 노래 싫어하는데~" 장면 자체도 웃겼지만, 음악의 어원을 파고 들어가면 폭소가 터질 수밖에 없어요. 아마 귀에 익숙한 음악이셨을 이 멜로디는 미국의 동요 'The Itsy Bitsy Spider'이기 때문입니다. 아주 작은 거미. 배수구를 타고 올라가던 거미가 빗물에 씻겨 미끌려 내려간다는 가사를 담은 노래. 우리나라에서도 익숙한 동요죠? 거미가 줄을 타고 내려옵니다~

 

 

 

또한 감탄할 수밖에 없는 부분은 어메이징 스파이더맨2의 액션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피터 파커의 액션이자 앤드류 가필드의 몸놀림인데요. 이번 작품을 보면서 새삼 느꼈던 것이 스파이더맨의 액션이 흥미로운 이유는 그것이 완성되어있지 않고 불안정한 데다 장난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슈퍼맨의 망토나 아이언맨의 슈트처럼 막힘없이 휘황찬란하게 날아가는 여유로움이 아니라 언제 터질지 모를 아슬아슬한 거미줄 장치를 위태롭게 빌딩에 붙여가며 이동하죠. 정확히 말하자면 스파이더맨은 나는 게 아니라 붙어 다니고 매달려 있는 거니까요. 하늘을 나는 수트를 입고 나타난 두 번째 악당이 그의 여자친구를 붙들어 이동하자 허겁지겁 붙어 이동해 쫓아가는 장면을 보세요. 너무나 애처롭고 불안정하죠. 다소 미완성되어 있는 결핍된 기술조차 소년 히어로, 스파이디를 닮아있는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받은 이후로 스파이더맨을 동경하게 되었다는 앤드류 가필드. 코믹스를 본 사람이라면 느끼겠지만 이 사람은 스파이디를 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원작과 흡사한 일치율을 보여줍니다. 특히 본인이 스파이더맨의 오랜 팬이기 때문에 연기 하나하나에도 스파이디를 향한 존경심과 애착이 느껴져요. 이전의 필모그라피를 보면 이런 블록버스터급의 히어로 무비를 선택했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인데 그것 또한 앤드류 가필드의 피터 파커를 향한 애정을 감지할 수 있는 부분이겠죠. 어린 시절 기계 체조와 수영을 선수 수준으로 배웠다는 그는 그저 액션을 잘하는 수준이 아니라, 빠르고 유연하게 틈새를 파고드는 거미 같은 동작으로 감탄을 자아냅니다. 실제로 보통은 스턴트맨이 연기할 대부분의 액션을 스스로 소화해냈다고 하더군요.

 

 

장난을 기반으로 한 스파이더맨의 액션은 그야말로 유머러스하고 혈기왕성합니다. 스파이디 액션의 기본 틀은 소년의 장난이니까요. 뉴욕 상공을 다이빙하듯 뛰어든 스파이더맨의 잘 뻗은 등으로 시작된 그의 액션. 폭탄보다 위험한 플라즈마 캡슐을 애기 어르듯 달래며 "아빠에게 오렴."하고 낚아챌 때는 정말. 그의 팔은 분명 두개 뿐이지만 이 장면에선 여덟 개의 다리를 가진 거미 같았어요. 스파이더맨 주제가를 휘파람으로 흥얼대며 범인을 묶어놓고 그의 바지를 벗기고 마지막엔 꽁하고 때린 뒤통수와 경례까지. 특히 제가 감탄했던 액션은 오히려 그가 스파이더맨 수트를 입지 않았을 때 나왔는데요. 여자친구인 그웬을 보호하고자 그녀를 도망치게 하곤 홀로 남아 커피잔을 이용해 쫓아오는 사람들을 유머러스하게 막아내는 장면은 마치 쿵후 영화 같아서 유쾌했던 장면입니다. 잘 만든 액션은 그 캐릭터의 서사를 담죠. 주변의 배경과 사물을 적절히 이용하면 더 고맙고요.

 

 

 

스파이더맨을 동경한 앤드류 가필드의 감성적인 연기력. 하이틴 스파이디의 희소가치를 버리지 않은 마크 웹 감독. 두 사람의 디테일과 원작 스파이더맨을 향한 존경심이 스파이더맨만이 가능한 로맨틱 감성 히어로를 만들어내지 않았나 싶습니다. 감성 히어로의 정점을 찍은 스파이더맨. 오랜만에 무척 재밌게 본 작품인 데다 할 이야기가 너무나 많은 왕성한 디테일을 가진 영화라서 드물게 2편의 리뷰로 작성해볼까 해요. 다음 편에서는 어메이징 스파이더맨2의 내용과 로맨스, 그리고 두 사람의 악당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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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5

  • ㅇㅅㅇ 2014.05.04 19:49 신고

    진짜 이번 스파이더맨은 제 입장에서는 최악이었다고 생각해요..
    솔직히 스파이더맨을 로맨스보러 가지 않잖아요.. 그대신 스파이더맨의 빌딩사이의 움직임이라던가 화려한 액션신을 기대하고 많이 갈텐데
    3명의 빌런중에서 7~80퍼센트는 일렉트로가 차지하고 나머지는 무슨 쩌리인지
    고블린은 몇분 잠깐 나왔다가 잡히고 코뿔소 같은 놈은 끝부분에 잠깐 나오고
    그럼 예고편에 일렉트로만 나오던가..

    그리고 여자친구랑 무슨 삼류 로맨스영화처럼 연애를 하는지.. 솔직히 스파이더맨 여친 행동하는거 보다가 빡쳤네요.

    확실히 스파이더맨 보러가는돈으로 캡틴아메리카2 한번더 보는게 훨씬 낫다고 생각해요

    • 저는 굉장히 재밌게 봤어요. 지적하신 부분. 로맨스 요소 때문에 더 좋아하는 작품이고요. 거미줄을 타고 빌딩 숲 사이를 매달려 나는 스파이디의 말랑말랑한 액션도 좋아하고요. 캡틴 아메리카 2도 좋은 히어로 무비지만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 또한 나름의 매력이 있어요. 모든 히어로 무비가 똑같은 성격을 가질 필요는 없으니까요. 원작의 피터파커를 좋아하는 제겐 스파이더맨은 원래 그렇게 보는 겁니다라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사람마다 취향이 다른 부분이니 애써 설득하고 싶은 생각은 안 드네요. 다만 너무 폄하하지는 말아주셨으면 해요.

  • 땡땡 2014.05.05 06:46 신고

    저도 닥터콜님 말처럼 재미만 있던데요.
    캡틴 아메리카 윈터숄져도 보고 이것도 봤는데 전 둘 다 재미만 있었습니다.
    모든 영화가 원작을 고집을 필요는 없고
    그리고 3명의 빌런중에서 일렉트로의 비중이 높다고 했는데
    전 오히려 이게 좋던데요.
    스파이더맨3처럼 악당들이 어중간하게 나오면 이도저도 아니게 되고 기억에 안 남게됩니다.
    솔직히 원작에서도 일렉트로는 매우 쎈 악당 중 하나이니 그렇게 나오지 않았을까요?

  • 흰곰 2014.05.05 11:34 신고

    안 좋은 평들이 많아서 접으려고 했었는데, 닥터콜님 덕분에 아마 한 번 보러 가게 될 것 같습니다...^^
    다들 같은 얘기를 한다면 리뷰를 보는 의미가 없겠죠.
    콜님의 글은 제가 지나쳤던 디테일을 다시 보게 만드는 경우가 많아서 항상 즐겨 보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 저도 마크웹의 스파이더맨을 더 열렬히 좋아해요^^ 십대의 설렘과 떨림 사랑 그리고 발랄함이 그대로 전해져서요~♥♥♥
    응사때부터 콜님 리뷰 꾸준히 보구 있어요.
    댓글 첨인데 인사드려요^^

 

 

-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져, 방패보다 강한 설득의 힘!

 

어벤져스로 마블을 배운 내게 캡틴 아메리카의 첫인상은 세상 재미없는 사람이었다. 꼴통 학급의 요주의 학생들만 모아놓은 것 같은 타 히어로들의 울퉁불퉁한 매력과 달리 그는 지나치게 도덕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농담과 진담도 구분 못 해 시종일관 정색에 혼자 인상 팍팍 쓰며 토니 스타크를 감시 감독하는 진지함이 참 싫었었다.

 

그에 비해 나른하고 불량한 아이언맨의 매력은 얼마나 유혹적이던가.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 같은 헐크의 옆구리를 꼬챙이로 찔러댄다든지. 스스로 테마송을 틀고 등장하며 섹시한 농담을 던지는 그 여유는 또 어떻고. “로마노프 요원. 나 안 보고 싶었어?” 아무리 심각한 상황에서도 느른한 유머 감각을 잃지 않는 토니 스타크의 불량미에 비해 캡틴 아메리카는 숨이 턱턱 막힐 만큼 고지식했다. 생각해보면 난 그의 건전함이 참 싫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내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의 능력은 자연스레 리더를 선점하는 위압감이었다. 그 자신이 요구한 것도 아니고 그렇게 정하자고 약속한 것도 아니었는데 모두의 암묵적 동의 속에서 캡틴 아메리카는 리더가 되어있었다. 다른 캐릭터를 더 좋아하는 나로서도 그것만큼은 투덜댈 수 없었다. 심지어 그 이상으로 어울릴 사람이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었으니. 따지고 보면 이것이야말로 캡틴 아메리카가 가진, 다른 불량 히어로들이 대체할 수 없을 그만의 희귀 기술이었던 셈이다.

 

캡틴 아메리카2는 고지식하고 근면한 스티브 로저스라는 인물을 위장하거나 포장하지 않았다. 어벤져스에서 압도적인 몸매를 자랑하며 샌드백을 치는 모습으로 관객과 인사를 나눴던 그 시절처럼 이번 작품에서도 스티브 로저스의 등장은 근면 성실하기 짝이 없다. 무려 아침 달리기로 포문을 여는 히어로라니. 그 와중에도 타인의 잘못된 자세를 교정하는 꼰대질을 놓치지 않는다. - 로마노프 요원이 캡틴 아메리카도 차를 훔치느냐고 장난을 걸었을 때 “빌린 거야. 훔친 거 아니야. 그러니까 차에서 발 내려.” 하던 스티브의 근엄함에 웃음이 터졌다. -

 

 

 

장한 일을 하고도 세계의 암적인 존재나 위협의 표적이 되어 신분과 얼굴을 감추는 여타의 억울한 히어로들과 달리 캡틴 아메리카는 타인의 귀감이며 청소년의 우상이자 아이의 꿈이오. 세계 평화의 상징적인 인물로 추앙받는다. 스티브 로저스 또한 이런 현실을 일말의 갈등 없이 받아들인다. 그게 왕자병 같은 모습으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객관화가 아주 잘 된 건강한 정신 상태의 인물이 아주 건전하게 스스로의 공로를 인정하는 형태로 받아들여져 거부감이 없다. 줄곧 냉소와 자기 비하에 빠져있는 타 히어로들의 고뇌에 비해 이런 스티브 로저스의 건전함은 산뜻하기까지 하다.

 

 

 

 

1941년. 캡틴 아메리카의 등장은 히틀러에게 주먹을 꽂는 파격적 행위로 시작된다. 미국의 반나치 히어로의 염원이 탄생시킨 캐릭터인 만큼 여느 히어로와 달리 정치적인 메시지를 설파한다. 그래서인지 신과 외계 종족이 등장하는 어벤져스의 캡틴과 단독으로 출연한 캡틴 아메리카의 캡틴의 이미지는 샴쌍둥이처럼 비슷하면서도 딴판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벤져스에서 싫었던 그의 성격이 단독 작품에서는 각별한 매력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유재석과 무한상사의 유부장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았다면 같은 선입견을 가지지 않았을까.

 

 

 

미래적 자원과 첨단 기술. SF적인 캐릭터가 등장하는데도 영화는 묘하게 올드한 느낌이 든다. 그것이 낡고 고루한 부정적인 감상이 아니라 어딘가 우아하면서도 아날로그적이다. 그래. 캡틴 아메리카, 스티브 로저스처럼. 선을 넘지 않는 말장난, 실물 크기의 적군과 품위를 지키며 싸우는 캡틴 아메리카의 모습은 고연령의 히어로를 배려한 제작진의 센스가 아닐까 싶었다. 21세기의 히어로 영화임에도 아날로그 시절 몸으로 싸우는 액션 히어로의 향수가 느껴진달까.

 

어벤져스에서는 캡틴의 무기마저 성에 차지 않았었다. 칼이 아닌 방패를 든 그는 여느 히어로에 비해 비효율적인 물건을 지닌 것만 같았으니까. 확실히 그 영화에서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 액션 또한 부각되지 않았던 것 또한 사실이고. 그러나 캡틴 아메리카2에서는 그의 방패가 얼마나 효율적인 물건인가를 여실히 증명해주었다. 방패와 거의 한몸이 되어 싸우는 캡틴 아메리카에게 그것은 누구의 것도 부럽지 않은 최고의 무기였다.

 

 

 

토르의 망치가 부럽지 않은 파괴력에 핵폭탄도 막아줄 것만 같은 수트 부럽지 않은 내구성. 그 덩치에 어디로든 날았다가 주인에게 되돌아오는 날렵한 탄성까지. 이 모든 기술을 조금의 어색함 없이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방패 액션을 구사하는 캡틴 아메리카의 몸짓은 마치 잘 짜여진 춤을 추는 것처럼 우아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대단한 그리고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캡틴 아메리카만의 최고의 능력은 방패도 액션도 아닌 그의 탁월한 리더십에 있었다. 영화 어벤져스에서 내 시선을 끌었던 장면 중 하나가 불량학생 같은 토니 스타크가 의외로 실전에서 캡틴 아메리카의 말을 고분고분 듣는다는 것인데. 싸움이 시작되기 직전에 그에게 무언가를 지시하자 군소리나 비아냥 한마디 없이 “예스. 캡틴.” 하고선 하늘로 퓨슝 날아가는 모습이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하긴 그러고 보니 그와 만났을 때 마치 경의를 표하듯 “캡틴.” 하던 아이언맨의 목소리 또한 기억에 남았었지.

 

 

 

폭력으로도 굴복시킬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을 캡틴 아메리카는 그저 그의 목소리에 신뢰를 담아 타인을 설득시킨다. 그 마음에 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할리우드 영화 특유의 억지 감동으로 느껴지지 않고 관객마저 수긍할 만한 설득력이 깃들었다. 그 순간 그가 왜 칼이 아닌 방패를 들었는지. 최선의 기술은 공격이 아닌 방어와 포용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정면 승부를 던진 캡틴 아메리카는 나태와 타락을 오가며 비탄에 빠져있는 최근 히어로계의 트랜드에 부합하지 않는 인물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돈이나 힘이 아닌 설득이 최고의 비기인 히어로라니. 세계의 위협이 아닌 신뢰와 사랑을 받는 히어로만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무기다. 허약한 소년이 혈청을 맞고 초인적인 인간으로 거듭나 냉동 기술로 수년을 잠재워져 다른 시대에서 살게 되었음에도 딱히 정체성을 의심하거나 비탄에 빠지지 않은 이유를 알 것만 같다. 그것이 칼이 아닌 방패를 든 히어로. 캡틴 아메리카의 상징성이다.

 

글의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자료의 저작권은 해당 제작사와 신문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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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4.18 15:25

    비밀댓글입니다

    • 저는 오히려 닥터콜님의 응답하라 1994’ , 이 드라마의 최종 결론은 김재준 찾기가 아니다.-라는 리뷰에서 보여준 애정어린 분석과 통찰력에 감탄하고 있습니다.
      제게 20년동안 TV 드라마 리뷰(TV 가이드,블로그등)중에서는 NO.01이라고 생각합니다.(영화는 이동진 문화부 기자 시절 시네마 레터)

      저는 이미라 작가의 순정만화 '늘 푸른 이야기'라는 책를 보지 않아서 모르고 있었는데, 닥터콜님이 ''늘 푸른 이야기'와'응사'를 씨실과 날실을 엮으면서 애정어린 분석과 통착력은 으뜸입니다.
      <'인어공주를 위하여'가 아닌 '늘 푸른 이야기'로 엮는 모습은... 감탄하고 있습니다.>
      (저는 시미즈 레이코의 '달의 아이'를 생각하고...,<-시미즈 레이코의 아름답고 탐미적인 작화와 이야기의 방대함(인류의 묵시록)에 놀란 경험이 있었서...)

      - 닥터 콜님의 응사 리뷰 연작은 NO1...

      아쉬운 점은 '신의 선물'이 안데르센의 '어느 어머니의 이야기'을 소품으로 사용되고 있었서(아이를 구하기 위해서...희생를 감수하는 모습이 '신의 선물'에서는 없다는 점이(남편의 불륜,주변인의 무관심)...

      닥터 콜님의 애정어린 분석과 통창력이 빛이 바랬다는 점...흑흑

    • 그 동화를 워낙 좋아해서 큰 기대를 걸어봤었는데. 드라마가 흘러가는 양상이 어째 제 인생 최악의 용두사미 영화 포가튼과 흡사해서 기대감을 살포시 접었더랬지요. 예상 그대로...^^;; 해설과 디테일이 부실할 땐 영락없이 음모론으로 흐르는 추리드라마. ㅠㅠ 미국은 외계인의 소행. 우리나라는 정부의 농간. 어느 어머니의 이야기는 없고 김수현의 모성애도 없고.. 겹겹이 쌓인 추리 속의 추리가 다소 피로하더라고요.

      응답하라 1994는 많은 영감을 주는 드라마였지요.^^ 늘 푸른 이야기나 점프 트리 에이 플러스 같은 90년대 순정만화의 코드가 몽실몽실 떠오르게 하는 드라마였어요. 아직도 가끔 몇몇 장면들이 스쳐 지나가곤 한답니다. 서영은의 블루문이라는 노래를 좋아하는데 이 노래가 OST로 사용된 게임 리플레인 러브의 엔딩을 보면서도 응답하라 1994가 떠오르더라고요. 그것도 대학생 하숙집 이야기라.^^ 서영은의 블루문과 함께 하숙집 학생들의 모습이 지나가는 그림이 마치 응답하라 1994 같기도 하더군요.

  • 시빌 워 ,캡틴 아메리카의 죽음-1권 : 꿈의 죽음, 2권:꿈의 무게, 3권:미국을 사 버린 남자에서 본 마블 유니버스에서의 캡아 캐릭터 집중탐구…
    마블 히어로들은 DC코믹스 히어로들(슈퍼맨,배트맨,원더우먼)의 이상적인 영웅 신화를 비틀어 결핍이 있는 캐릭터 노선으로 마블 유니버스를 창조…
    마블 히어로들은 영웅 신화의 서사를 근간으로 현대적인 결핍를 더한 캐릭터인데,

    캡아는 독특하게도 영웅 서사가 아닌 예수 서사를 차용…그래서 1950년 이후 올드한 영웅으로 졸망 후 1960년대 어벤져스 리더로 화려하게 부활…
    <- 스티브 로저스는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중에서 패트릭 헨리(반연방주의자)가 모델.

    캡아는 다른 마블 히어로들(우연한 사고(?))과 다르게 목숨를 담보로 슈퍼 솔져 시험에 참여하고,
    직접 군사 작전에 참여 … 항상 선봉에서 지휘
    그리고 퍼스트 어벤져에서 마지막에는 개인적인 감정(페기 카터에 대한 사랑)를 포기하고,
    자기 진정한 용기와 애국심은 자기 희생에 있다는…-일명 : 전설의 솔져.
    진정한 용기와 애국심은 자기 희생에 있다는… - 일명 : 살신성인 솔져.
    그리고 캡아의 정신를 계승한 쉴드가 탄생….. 쉴드는 영어 약자이지만,중의적인 말은 방패(보호자)…
    페기 카터와 하워드 스타크는 창립 멤버이고,
    필 콜슨 요원은 캡아 오타쿠…
    쉴드는 캡아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믿음으로 60년 동안 캡아를 찾고
    <- 눈물 겹운 하워드 스타크의 노력…
    드디어 60년만에 캡아가 부활를….. 할렐루야
    닉 퓨리국장은 실행 불가능한 프로젝트-어벤져스를 캡아 중심으로 가동,
    물론-스타크(아이언맨)는 조건부 제외...

    영화-어벤져스에서 1시54분경에 이상한 장면이 하나 나옵니다.
    그것은 지하철에 있는 사람들를 구하고, 폭탄의 충격으로 거리로 뜅겨져 나간 상태에서, 상념에 젖는 표정으로 난장판이 된 거리를 보는 장면…
    이 장면은 응사 11화에 삼풍 백화점 참사...응급실에서 정우가 눈물를 흐르는 장면과 묘하게 오버랩이 되었습니다.
    (순서적으로 어벤져스에서 이상한 장면이라는 생각..->응사를 보면서 어벤져스 장면이 생각이 나고->다시 어벤져스를 보면서 캡아2에 대한 기대감 폭발..)

    마블 히어로들은 사적인 욕망,갈등등으로 서사가 진행이 되면서 캐릭터의 매력이 폭발하지만,
    캡아는 거대한 담론(자유)으로 서사가 진행이 되면는 캡아의 매력이 폭발하는 케이스
    <-캡아의 백미는 시빌 워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ly)" - 신념과 용기…

    그리고 비록 네가 죽지만, 나를 따르는 친구와 나를 믿는 사람들은 살릴다는…살신성인..

    인간으로 전장에서 활동한 호크 아이(암살자),윈터 솔져(암살자)그리고 팔콘(트라우마가 있는 군인)은 캡아가 언제나 자기 희생를 담보로 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것을 지키고 싶은 마음으로…. 캡아의 호위 무사(일명:사이드킥으로 활동)…

    * 캡틴 아메리카의 자유에 대한 신념과 용기..그리고 희생를 담보로 하는 설득을 거부할 수가..


    P.S- 세월호 선장의 행동(배를 버리고 도망을 치는)을 보면서 캡아의 나를 따르는 사람과 나를 믿는 사람들은 살릴다는 살신성인이 얼마나 중요하지를….
    세월호 승무원 고박지영씨는 진정한 헤로인 [heroine] ….
    세월호 승무원 고박지영씨의 행동을 듣고, 눈물이 나는 하루였습니다.



    • 진순정님의 다방면의 문화에 쌓인 다양한 경험이 존경스럽습니다. 마블 코믹스에 관심을 두고있는 요즘 단비 같은 글이네요. 캡틴 아메리카의 리더십과 희생 정신이 그 어느 때보다 갈급한 요즘입니다.

  • 90년대에는 오태호의 서정적인 노래가 대학가에 강타를 하고 있었죠..
    지금 생각를 하면는 응사에서 오태호(작사/작곡/노래)의 노래가 많이 나오는 것은 오태호가 90년대에 특화된 작사/작곡가라는... 지금은 잊혀진 아려한 사람....

    김현식의 내사랑 내곁에/피노키오의 사랑과 우정사이/이승환의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이승환의 '화려하지 않은 고백'/강수지의'I miss you'/이상우의 '하룻밤의 꿈'/이오공감 '한사람을 위한 마음'/이오공감'플란다스의개'/이오공감-사랑이그리운날들에

    저는 이승환의'기다린 날도 지워질 날도'/오태호의 '기억속의 멜로디'그리고 이범학의 '이별아닌이별'를 제일 좋아합니다.
    -지금도 계속 애청하는 노래...

    특히 오태호의 '기억속의 멜로디'에서 처음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Michel Polnareff 의 Qui A Tue Grand Maman 부분... - 기억을 걷는 기분...






대체 불가능한 매력을 가진 배우의 경우 거물급 스타나 연기신이 아니더라도 그 이상의 캐스팅 욕구를 불러일으키곤 합니다. 송중기나 박보영. 그리고 이민기와 김고은. 가진 얼굴만으로도 스토리가 술술 나올 것 같은 그들의 매력은 마치 만화 같아서 만화나 소설의 이미지화를 바라는 네티즌들이 주로 가상캐스팅의 주연 배우로 써먹곤 했었습니다. 그래서 늑대소년 만큼이나 몬스터의 개봉일을 기다렸었지요. 다름 아닌 이민기와 김고은의 합작이라고 하니까요. 거기다 제목부터 몬스터라니,

 

 

 

 

제작진의 의도가 우리 같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찌 됐던 그와 그녀의 캐스팅과 그들의 조합은 기대 이상의 성공을 가져다준 듯해 보였습니다. 몬스터의 소감을 두루 살펴보아도 좋았다는 평의 8할은 이민기와 김고은의 호연을 꼽고 있거든요. 적어도 이 두 배우의 캐스팅에 대한 아쉬움이나 연기력에 불평을 쏟아내는 의견은 거의 찾아보지 못했답니다.

 

 

 

몬스터 (Monster, 2014)장르스릴러2014.03.13 개봉런닝타임 114분한국 청소년 관람불가

출연 이민기, 김고은, 김뢰하, 안서현, 김부선

 

애석한 사실은 너나 할 것 없이 조건부 찬사라는 것이죠. 영화도 재밌었고 배우의 연기력도 좋았다가 아닌 형편없는 와중에 그나마 이민기가 살렸다는 식의. 사실 이 리뷰의 제목에 편의상 호불호라는 표현을 썼지만 – 호불호라면 상반된 의견이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을 기세로 첨예하게 맞부딪히는 모양새를 뜻하는데 – 그런 표현이 민망할 정도로 ‘호’한 의견은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대부분 불호더군요. 캐스팅을 제외하면 말이에요.

 

그럼 너는 어느 쪽이었느냐. 저는 몇 안 되는 호! 쪽에 손을 들겠습니다. 그렇다고 이 비평을 넘어선 악평들이 너무 야박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확실히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그럴 만도 하다고 느껴지거든요. 몬스터는 아주 불편하고 어질어질하고 또한 참혹한 영화니까요.

 

 

 

 

일단 영화에서 내건 홍보 문구대로 미친년과 살인마의 싸움이라는 소재부터가 그렇죠. 이 둘은 미친 것 외의 공통점이 또 하나 있습니다. 힘의 원천이자 살육의 동기가 가족이라는 사실이죠. 정신 나간 사람은 장정 몇이 달려들어도 이겨내지 못한다고 하고 인간은 가족을 위해서라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는데 이 두 가지의 조건을 모두 가진 미친년, 살인마의 힘이 오죽하겠습니까. 하물며 이 둘이 맞붙어 싸운다는데요.

 

익상(김뢰하 분)은 그의 부유한 삼촌에게 한 가지 의뢰를 받습니다. 여자가 하나 있어. 머리 좀 쥐어박았다고 3억을 달래. 증거 영상이 담겼다는 휴대폰과 합의금 3억을 맞바꾸라는 명. 핑계가 영 치졸하다 느끼지만, 이래저래 따질 여유 따윈 없었어요. 돈이 궁한 익상은 3억을 꿀꺽 삼켜버립니다. 그리되니 3억과 맞바꾸어야 할 휴대폰이 문제죠. 혼자서 발 굴러 봐도 궁리가 안 나오자 그는 ‘특수한 이유’로 4년간 연을 끊었던 남동생을 찾습니다.

 

 

 

이민기는 바로 이 남자의 위험한 동생 태수를 연기합니다. 그는 소위 건드려선 안 될 미친놈 연기를 신들린 듯 소화해내는데요. 차마 죽여서 뺏어오라곤 못하고 비겁하게 웅얼거리는 형을 피실피실 웃으며 애태우다 느닷없이 행인에게 시비를 걸어 몇 차례 되지도 않는 동작으로 숨통을 끊어 놓습니다.

 

감독은 이런 태수의 특수성을 단 몇 장면의 충격적인 비주얼로 온전히 이해되게끔 해놓았습니다. 다음 화면에서 채 죽지 못해 타들어 가는 목을 꺽꺽대는 소리와 바 위에 널브러져 있는 또 다른 희생자. 그게 일상적인 장면인 듯 아무렇지 않게 그 아래서 술을 마시는 위험한 남동생, 태수.

 

이 영화를 위해 10kg가량을 감량했다는 이민기는 기이할 정도로 아름다운 자태를 뽐냅니다. 흑표범 같기도 하고 존재치 않을 환상 같기도 합니다. 이민기가 등장하는 장면, 하나하나마다 그대로 만화 컷의 먹물 먹인 펜 터치 같더군요. 감독 또한 이런 이민기의 아름다움을 훼손치 않으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설정된 캐릭터는 여자건 아이건 괘념치 않고 살해하는 살인마인데 어쩐 일인지 태수는 망설이거나 져주거나 심지어 기회를 주기까지 합니다. 그나마도 직접 상해하는 장면은 최대한 배제했더군요. 이 때문에 세기의 대결처럼 홍보 삼았던 미친년과 살인마의 싸움은 주제는커녕 보조 소재조차 되지 못합니다. 그저 쫓고 쫓기는 이야기가 다니까요.

 

공권력이나 해병대조차 무서워하지 않은 태수에게 유일한 아킬레스건은 바로 그의 가족입니다. 그냥 내팽개쳐도 될 텐데 4년씩이나 아니 어쩌면 만난 그 순간부터 버림받았으면서도 태수는 가족이라는 끈을 차마 놓지를 못합니다. 태수의 사이코패스적인 특성이 두려워 킬러를 대동하고 온 형을 피 묻은 얼굴로 다정스레 “오랜만에 엄마랑 외식이나 할까?” 라고 묻는 그.

 

어쩜 이때까지만 해도 태수는 몬스터가 아닌 저주받은 늑대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늑대는 무리 생활을 하는 동물이고 철저히 우두머리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니까요. 소속감이 생의 의미인 늑대 태수는 선천적으로 버림받을 운명을 타고났기에 인류를 배반하는 행위를 하면서도 막상 그의 유일 공동체인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무감한 눈빛으로 여자아이를 살해하고 피 묻은 얼굴로 싱긋이 웃는 그가 막상 가족 앞에서는 구차하리만큼 작아지는 모습에 차마 미워하고 싶어도 미워할 수가 없더군요. 이민기가 연기한 대부분의 인물을 놓치지 않았지만, 그만큼이나 그림처럼 어울린다는 표현을 쓰고 싶은 캐릭터는 없었답니다. 특히 놀랐던 건 이민기 특유의 – 매력이라고도 족쇄라고도 할 수 있을 – 사투리 억양이 이 작품에선 거의 들리지 않았다는 겁니다.

 

적어도 몬스터는 이민기가 연기한 많은 작품들 가운데서 가장 목소리가 멋있는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배우 이민기의 연기를 쭈욱 지켜봤던, 들었던 사람이라면 그가 내뱉는 첫 대사에 아마도 오오- 하고 놀라실 걸요.

 

 

 

 

몬스터가 가상 캐스팅 전문 배우 이민기의 부족했던 무엇을 충족시켜준 연기였다면 김고은에겐 기대했던 그만큼의 연기를 보여준 작품이었습니다. 저는 김고은의 데뷔작 은교에서 그녀가 할아버지에게 인사하고 떠날 때 들려준 여고생 특유의 발성을 잊지 못하는데요. 이미 성인이면서도 다소 어눌하고 애티가 나는, 예의를 갖춘 그 “안녕히 계세요-” 라는 한마디에 많은 기대를 걸었었어요. 몬스터에서 그녀가 연기한 복순은 그 민낯의 느낌을 그대로 확장해놓은 캐릭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가족이 족쇄인 태수와는 같은 의미이자 다른 뉘앙스로, 복순에게 있어 그녀의 하나뿐인 가족인 똘똘이 여동생은 태양이자 삶의 의미였죠. 업둥이처럼 여자아이 하나가 찾아온 다음 날에 여동생이 두고 나온 체육복을 찾아 돌아오다 발견한 소스라칠 광경. 장신의 살인마가 여동생의 목을 조르고 있는 그 모습을. 그 경황 중에도 울먹거리며 “잘 생겼어요.” 라고 범인의 인상착의를 읊다 고스란히 미친 사람 취급당하곤 나 어떻게 해야 해요? 그냥 집에 가요? 애처럼 꺽꺽대는 김고은의 모습이 어찌나 애처롭고 사랑스럽던지요.

 

 

 

 

포스터의 선전 문구와 달리 김고은과 이민기의 상대자는 서로가 아니라 그들의 가족입니다. 마치 복수극처럼 시작되었던 이야기는 복순이 새로 얻은 동생 나리(안서현 분)을 지키는 추격전으로 변질하고요.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데다 폭력적이며 살육마저 아무렇지 않은 태수의 가족들은 소시오패스 모임 같아서 분명 그의 미친 행위가 타고난 것만은 아니라 일정 부분 학습된 것임을 짐작하게끔 합니다. 이런 부분이 영화의 호불호를 결정하는 중대한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아무래도 관객이 이 영화의 홍보 문구에 기대를 걸고 들어온 장면은 이민기와 김고은의 대립이자 로맨스였을 테니까요.

 

두 사람의 연관성은 거의 방관자에 가까운 타인에 그지없지만, 주인공 이외의 조합 또한 매력이 있긴 합니다. 특히 복순을 유일하게 미친 사람 취급하지 않고 어엿한 어른으로 대접하는 나리의 당돌한 존댓말과 지킴 받아야 할지 보호해 주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 어른 아이 복순의 만담 같은 호흡은 기쿠지로의 여름이나 요즘 유행하는 겨울왕국의 자매애와 비슷한 방향의 흐뭇함을 선사해주지요.

 

스릴러를 표방하지만, 영화에서 전달받는 느낌은 심지어 살육하는 순간마저도 공포만은 아닙니다. 마치 신맛, 짠맛, 매운맛이 동시에 느껴지는 톰얌쿵처럼 영화는 관객을 마냥 공포에 질리거나 슬픔에 빠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극의 상황이 처절한 비련일수록 웃고 싶어지는 장면이 대다수여서 상갓집에서 웃긴 생각이나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사람처럼 눈치를 보게 되더군요. 저는 도리어 그 부분이 매력적이었지만, 대부분의 관객에겐 낯설고 불편한 느낌으로 받아들여졌을 겁니다. 그게 몬스터와 관객의 소통을 막아선 원인이었겠죠.

 

 

몬스터라는 제목처럼 사람 같지 않은 이상한 사람들이 범람하는 세계관의 몬스터. 정신 나간 여자 복순과 사이코패스 태수. 영화 초반만 해도 이들 모습 자체로 그저 몬스터인줄로만 알았죠. 하지만 그들이 진정 몬스터화 되는 것은 영화의 클라이맥스 부분이었습니다. 태수에게 있어 유일한 인간의 증명이었던 가족에게 끝끝내 버림당했을 때 그는 급기야 괴물의 형상으로 변이합니다. 이목구비가 드러나지 않는 짐승의 얼굴을 하고 사람의 언어를 포기한 것처럼 으르렁대는 울부짖음에 심장이 덜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참 서글프더군요.

 

태수에 의해 삶의 의미가 차례차례 무너진 복순은 그저 동네 미친 여자가 아닌 인간성을 버린 괴물이 되어 태수를 공격합니다. 사람의 탈을 벗어버린 것처럼 스스로 얼굴에 피 칠갑을 하고 복수의 대상 앞에 다가선 복순. 그녀에게는 더 이상 살인자를 향한 공포심도 그녀 특유의 가벼운 유머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저 피의 살육을 구하는 괴물의 분노만이 자리 잡았을 뿐이죠.

 

 

 

타인의 몬스터일 뿐이지만 가족에게만큼은 충견이고 싶었던 태수. 여동생이 있어 행복한 미친자로 살아갈 수 있었던 복순. 브레이크가 필요했던 남자. 삶의 의미가 곧 지성이었던 여자. 울타리를 잃어버린 인간은 몬스터가 된다. 영화 몬스터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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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 묘한 영화군요. 톰양꿍 같은 느낌이라니. 사실 기대 많이 하고 있었는데 시나리오 자체가 다소 수월하게 볼 수 있는 시나리오가 아닌가봐요. 아직 보지 못했지만, 기회 되면 봐봐야겠네요.

    • 달콤한 맛 뒤에 신맛이 있고 짠맛을 음미하려면 매운맛이 올라오는 그런 느낌의 영화랍니다. 쉽진 않으실 거예요.^^;;

  • 2014.04.09 18:56

    비밀댓글입니다

    • 안녕하세요. 확실히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보니 관객과의 괴리감을 느끼셨을 듯해요. 그래도 저는 꽤 흥미롭게 봐서 재관람하고 싶었는데. 때를 놓쳤는지 근처 극장에선 이미 내려버렸더군요.ㅠㅠ

  • 저는 개인적으로 신정원 감독(시실리2km,차우)이 감독를 했으면,블랙코메디 장르와 스릴러 장르가 결합된 똘끼 있고 독특한 괴작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됩니다.(아니면 공동 감독이라도..)

    신정원 감독의 그 똘끼 있는 괴작-차우(괴수물이 블랙 코메디에서 인간의 잔인성 그리고 엄마 맷돼지와
    아기 멧돼지 사이의 모성애로 가는 똘끼)

    황인호 감독하고 같이 각본을 쓰고 처음 영화판에 데뷔한 시실리 2km - 조폭 코메디물과 호러영화의
    결합이 정말 독특한 괴작(?)

    처음에 "몬스터"가 신정원 감독이 감독이 만든 작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또 똘끼 있는 작품를 만들어네....
    신정원 감독과 황인호 감독은 서로 독특한 생각를 공유하는 데드 링거(Dead Ringer)..라는 느낌...
    신정원 감독과 황인호 감독의 하이브리드적인 장르가 뭐가
    굉장한 작품이 나오거나 아니면 만년 유망주이거나...
    뭐가 기대가 되는 감독들입니다.

  • 웃프다고해야하는
    애매하게매력적인부분이잇엇어요
    써주신글덕분에
    끝까지잘봣다싶네요
    저는별다섯개입니다

 

 

리암 니슨은 여전히 딸바보고 타인의 안전을 지키는 직업을 가졌습니다. 당연한듯 납치범은 그의 주변에서 알짱대고 아저씨는 직업적 능력을 십분 발휘해 범인을 검거합니다. 물론 이야기가 온전히 이렇게만 진행된다면 아무리 리암 니슨 주연의 영화라도 표절 혐의를 벗어날 수 없을 테죠. 분명 논스톱은 테이큰이 없었더라면 제작조차 되지 않았을 영화 같지만 경악한 아류작이라거나 자가 복제의 그늘이라는 핀잔을 듣기엔 억울한, 논스톱만의 개성을 가진 영화입니다. 심지어 리암 니슨 표 추격전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장치를 넣기도 했죠.

 

 

 

전 세계를 무대로, 추격전을 벌이던 리암 니슨의 행동반경이 논스톱에서는 세계는커녕 마을의 범위조차 되지 않을 만큼 축소되어 버렸습니다. 온갖 종류의 탈것과 튼튼한 두 다리로 세계를 누비고 다녔던 리암 니슨이 허공 위의 탈것에 발이 묶여 세상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는 106분을 담아냈습니다. 그의 추격전은 오로지 뉴욕에서 런던으로 향하는 비행기 내부로 국한되어 있습니다. 


더군다나 리암 니슨이 맡은 배역 빌 막스는, 부자연스럽고 불편하며 핸디캡이 많은 인물입니다. 알코올 중독자에 일 처리는 호전적이며 사교성마저 없죠. 한정된 공간만큼이나 폐쇄적인 행동반경에다 다소 아둔하리만큼 범인과의 심리전에 번번이 당하고야 마는 모습은 "이건 내가 알던 대디가 아냐!" 라고 비명을 지를 만큼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그야말로 흐르는 물처럼 막힘이 없었던 테이큰의 아빠는 어디로 가고 내놓는 아이디어마다 실패에 대중의 야유를 받는 리암 니슨의 모습은 참으로 봐주기 힘들더군요.

 

 

 

하지만 핸디캡을 가진 캐릭터인 만큼 인물의 내적 갈등은 테이큰에 비해 더 견고해진 감은 있습니다. 우리 아빠는 슈퍼맨!의 테이큰과 달리 초라한 외톨이에 상사는 물론 도움을 주려는 사람들에게까지 신뢰를 얻지 못하는 고개 숙인 불량 아빠, 빌 막스의 모습은 딸이 납치될 때보다 슬펐던, 양아버지에게 달려가는 딸을 허망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브라이언 밀스의 눈빛을 고스란히 확장시켜 놓았습니다. 자랄 수 없는 딸이 건네준 용기의 리본을 손에 꼭 쥐고 비행기 공포증을 이겨내는 리암 니슨의 모습이라니. 


빌 막스에게 당하기는커녕 오히려 희롱하며 그를 점점 외톨이로 몰아가는 범인의 심리전은 반전을 거듭해나가며 초조하고 스트레스 쌓이지만, 또한 스릴 만점인 재미를 선사해줍니다. 문제는 제작진이 부풀려놓은 두 개의 미스터리. '범인은 누구인가?' '리암 니슨은 왜 표적이 되었는가'를 결국 용두사미에 과대 포장으로 매듭지어버린, 허무하기 짝이 없는 악의의 개연성입니다. 한심한 대의명분에 황당한 표적의 동기. 범인의 뒤통수를 쳐주고 싶을 만큼 그가 나불대는 말에 도무지 설득이 가지 않더군요. 그냥 싸이코 하나가 날뛰었다고 단정 짓기엔 이전의 심리 싸움이 너무 거창했고요.

 

 

이런 영화는 제작진의 트랩을 밟지 않은 듯 밟아버린 관객이 확신에 찬 추리를 내놓았을 때 뒤통수를 맞는 맛과 엎질러놓은 떡밥을 수습하는 재미인데 논스톱의 결말은 극의 서사로도 미스터리의 해답으로도 하나 충족하지 못한 허술한 마무리일 뿐이었습니다. 덧붙여 일본 드라마에서나 볼법한 리암 니슨옹의 설교 타임은 그나마 담백하기라도 했던 극의 미덕을 깎아버린 장면이었고요.

 

 

 

사실 영화 내용보다 제 눈에 들어왔던 장면은 바로 극장 자막의 혁명이라고 해도 좋을 영화 논스톱의 자막 퀄리티였습니다. 가독성이 높은 번역의 수준도 뛰어났지만. 무엇보다 자막 또한 극적인 장치로 이용한 연출 효과가 무척이나 인상적이더군요. 그저 평면적으로 줄 세워진 자막이 아니라 범인의 메시지를 받은 주인공의 목 죄는 심리 상태를 표출하듯 산발적으로 흩어진 자막이나 액정이 깨져 제대로 보이지 않는 메시지를 깨진 유리 위의 글자처럼 그려놓은 장면은 번역의 수준을 넘어 예술의 경지에 올라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자막의 효과 덕분인지 역시나 영화에서 가장 즐겁게 감상했던 부분은 그림자 속의 범인과 빌 막스의 문자 대화까지였습니다. 이만큼 공들여진 초반을 뒷심 부족으로 무너뜨리다니요. 그저 허술한 마무리 때문에 영화의 전체적인 감상평마저 깎이는 느낌이라 지극히 안쓰러운 영화, 논스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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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는 리암니슨만 보면 테이큰의 잔상이 너무 커서 논스톱 보는데 집중이 잘 안되더라구요 ㅜㅜ

    • 테이큰이 존재치 않았더라면 제작되지 않았을 영화이니 더욱 그렇게 생각되셨을듯 합니다. 그래도 저는 추격전을 워낙 좋아하는 편이라 꽤 재밌게 봤었네요.^^

  • 자막계에서 장인정신을 갖고 해내는 사람들을 한번 들여다보고 싶어지는 포스팅이네요^^

  • 진화와 퇴화를 동시에 구축하는 걸 보면, 자막 업계(?)도 여러모로 정신이 없는 모양임돠.

  • 관객이 확신에 찬 추리를 내놓았을 때 뒤통수를 맞는 맛과 엎질러놓은 떡밥을 수습하는 재미..
    으악 이것만 봐도 완전 느끼고 싶지 않은 기분이에요 ㅠㅠ
    이건 재미가 아닌데;; ㅋㅋ 근데도 보고싶은건 왜일까요?
    닥터콜님의 글을보면 뭔가 나는 어떤 감정을 느끼려나? 하는 호기심이 마구 자극되어져여

    자막은 제가 엄청 좋아하는 종류로 나올거 같네요!
    이번주에 봐야겠어요 ㅋㅋ

    갑자기 든생각은 닥터콜니을 광고계로 끌어들이면 뭔가 엄청날듯하네여 ㅋㅋㅋ

  • 맞아요 왠지 적막한 분위기 속에...

    자막을 보고 있으니,

    그 전달감이 훨씬 더 좋아던 것 같습니다.

  • 영화는 그럭저럭 본 것 같아요.
    테이큰 같은 스케일은 없었던 듯 싶구요.
    많이 공감하고 갑니다~~~

  • 원판에서도 문자메세지가 자막효과 되어 나옵니다.

 

 

-300: 제국의 부활, 죽음마저 아름답다

 

7년 만에 돌아온 300은 2006년 판의 다음 이야기가 아닌 동시간대의 또 다른 전투를 기록했다. 페르시아 100만 대군과 맞섰던 300명의 스파르타 용사들. 전쟁이 아니라 투신에 가까웠던 1편의 배턴을 이어, 역시나 골리앗 대전을 벌이고 있었던 아테네 용사들의 전투를 담은 것이 바로 300의 후속작, 300: 제국의 부활이다.

 

테르모필레 협곡의 전쟁을 다뤘던 300, 1이 육상전이었다면 2편의 용사들은 바다라는 링 위에서, 페르시아 해군과 그리스 해군의 자긍심을 걸고 살라미스 해전의 해상전을 벌인다. 잭 스나이더의 공백을 채운 노암 머로 감독은 바다 위의 300을 패션 화보집처럼 구성했다. 전작보다 많은 슬로우모션이 사용되었고 작은 틈 하나도 허용치 않은 듯한 특수 효과들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덕분에 300은 무척이나 아름답다. 또한, 스타일리쉬하다. 블루스를 추듯 멈춰있는 액션. 비극을 암시하듯 경악의 눈망울로 채워진 검은 말의 클로즈업. 빛과 색의 쓰임새 또한 예사롭지 않다. 허공을 가르는 테미스토클레스의 푸른색 로브, 허수아비 황제가 되어버린 크세르크세스가 엉덩이를 흔들며 걸어갈 때 마치 석양을 받은 밀밭처럼 황금빛으로 물들어진 화면. 천지창조처럼 구름 사이를 비집고 나온 빛줄기 하며 작은 창고에서조차 빛을 이끌고 다니는 부유물을 오밀조밀 배치해놓은 강박증엔 그저 한숨이 다 나왔다.

 

특히 감탄이 나왔던 것은 신화적 표현과 고대의 마물을 묘사하는 연출력에서 조금의 이질감조차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 조악한 미술에 이따금 서프라이즈를 떠올리곤 했던 폼페이를 생각하니 300의 미술은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작년 맨 오브 스틸을 보며 판타지를 이토록 이질감 없이 표현해낼 수 있는 연출력이라면 드래곤볼의 - 제대로 된 - 영화화 역시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제국의 부활 또한 같은 희망이 느껴졌다.

 

 

 

아무렇지 않게 목이 뽑히고 팔이 잘리는 섬뜩한 장면들이 넘쳐나지만 그럼에도 고어한 느낌이 없다. 도리어 아름답다. 걸쭉한 핏줄기조차 미술적 장치로 느껴졌을 정도다. 영화가 아니라 보그지를 넘기는 기분이 든다. 지나치게 아름다워서 생동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 아름다움엔 이야기가 없다. 이 영화의 러닝타임은 짧은 편이지만, 이야기 없이 인공미로 가득 찬 화면을 한 시간 이상 견뎌내기란 벅찬 일이었다.

 

마치 성서의 살로메가 떠오르는 에바 그린의 '아르테미시아'만이 화보집 같은 300의 유일한 이야깃거리였다. 페르시아의 속국, 카리아의 여왕 아르테미시아라는 실존 인물에서 이야기를 가져온 아르테미시아는 의붓아버지에게 세례자 요한의 목을 요구한 살로메만큼이나 아찔하고 도발적이다. - 아르테미시아 또한 다리우스 왕의 의붓딸이라는 사실. 그녀가 왕의 인정을 받기 위해 적군의 목을 양손에 들고 선물로 바치는 장면 또한 살로메의 이미지와 흡사하다. -

 

 

 

유혹적인 몸매와 고혹적인 눈빛을 가졌지만 거침없는 포즈로 적을 희롱하고 아무렇지 않게 그의 목을 따 입을 맞춘다. 망설임 없는 에바 그린의 연기력은 독 담은 성배 같은 아르테미시아의 이중적 매력을 그림 같이 묘사해낸다. 그녀의 미모에 못지 않은 연기력을 보며 생뚱맞게도 나는,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연기를 잘한다면 저런 느낌이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300이 아닌 장발장이 더 어울릴 듯한 설리반 스탭플턴의 테미스토클레스는 액션은 좋았지만, 줄곧 멍한 표정에 카리스마가 별반 느껴지지 않아 아쉬움을 더했다. 300하면 떠오르는 강한 남자의 이미지가 제국의 부활에서는 에바 그린의 기에 눌려 하나같이 약한 남자로 돌변해버렸다. 양기를 이기는 음기라. 어쩐지 동정 이미지에 초식남 같은 테미스토클레스가 야수 같은 여자 아르테미시아와 전쟁 같은 성교를 치르는 장면만이 그나마 사람의 이야기다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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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상한 그녀, 노인을 원하는 사람은 없다. 원해서 노인이 된 사람이 없는 것처럼.

 

"너의 젊음이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나의 늙음도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내게 은교는 한국판 롤리타가 아니다. 소녀를 향한 비뚤어진 욕망이라 불리기엔, 박해일이 분한 이적요는 제레미 아이언스처럼 아름답게 묘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적으로 묘사된 노인의 늙은 몸을 내려다보다 꺼져가는 이적요의 한숨으로 시작된 은교는 소녀와 노인의 사랑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근원적 공포와 혐오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는 모두 노인이 되어간다.

 

작품성과 무관하게 잘 만든 영화가 더러 존재한다. 수상한 그녀는 그런 부류의 영화다. 듬성듬성한 전개와 허술한 마무리. 여러모로 아쉬운 개연성 탓에 명작 반열에 올릴 순 없어도 성별과 나이를 막론하여 누구나 재미있게 즐길 수 있을 법한 영화다. 한마디로 영화가 참 착하다. 한국 코미디 영화 특유의 불쾌한 성적 농담이나 차별적인 표현이 없고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인물조차 없다. 이 영화의 평점이 관객과 전문가들 사이에 극과 극으로 나뉘는 것 또한 이런 이유일 것이다. 전문가에게 환영받을 만한 영화는 아니지만 두 시간의 유희 거리로는 손색이 없다. 이 영화 특유의 범용성을 돌이켜본다면, 최근 개봉된 작품 중 이만한 가족 영화도 없다고 생각한다.

 

 

 

오말순 여사(나문희 분)는 특별하지만, 그래서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보통의 대한민국 할머니다.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만 죽자고 쫓아다니는 종의 아들에게 알레르기가 있는 것도 모르면서 내둥 복숭아만 선물하는 무심함에. 그러면서도 남 주기는 아까워 다른 여자에게 눈길 주는 꼴은 못마땅해 하는 적당한 이기주의. 신경 거슬리게 하는 여편네랑 머리채를 휘어잡고 나뒹굴어 싸우기도 하고 3만 원 조금 못 되는 파란색 꽃신값이 아까워 시장을 세 바퀴나 돌며 망설이는 그런 보통의 할머니다.

 

아무리 영화 속 주인공이라지만 며느리에겐 그저 매정한 시월드일 뿐인 오말순은 마냥 아들 지상주의에 며느리를 잡다가 퉁퉁 부어터진 얼굴도 알아채지 못해 응급실행을 시킨다. 이제 아무 쓸모도 없어진데다가 성가셔지기까지 한 어머니를, 심지어 노인 전문가라는 아들 현철이(성동일 분)조차 감당 못 해 요양원으로 보낼 궁리를 하니 지나간 세월을 서러워하던 할머니는 그녀가 그토록 동경하는 오드리 헵번 사진이 걸린 사진관 안에서 조금은 특별한 경험을 선물 받게 된다. 빌 게이츠의 재산으로도 되돌릴 수 없는 그것. 바로 청춘을 다시 한 번 경험해보는 것.

 

 

 

칠순을 넘긴 나문희 얼굴의 오말순이 사진관을 빠져나오며 솜털이 보송보송한, 스무 살의 심은경이 된 것이다. 오말순의 자아는 나문희의 것이지만 스토리의 90퍼센트 이상은 만 19세의 심은경이 이끌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녀의 얼굴을 하고 노인의 구성진 말투와 폼을 흉내 내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은 주로 시트콤이나 개그콘서트 같은 개그 프로에서 자주 본 것이라 낯설지 않다. 심은경은 유머에 사랑스러움을 덧붙인다. 오드리 헵번의 머리를 하고 복고풍 드레스를 입은 채 마치 로마를 유람하는 앤 공주님처럼 시장을 나빌레라 활보하는 심은경의 모습은 넋이 나갈 만큼 아름다웠다.

 

특히 노래 좀 한다는 설정에 손자가 리더를 맡은 반지하 밴드의 리드 보컬이 되어 나성에 가면을 부를 때면 그 뒤뚱뒤뚱 깜찍한 율동과 맑은 목소리가 마치 2004년의 문근영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던 영화 어린 신부의 한 장면이 떠오르기도 했다. 교복을 입고 '난 아직 사랑을 몰라'를 열창하면서 군인 아저씨들의 마음을 휘어잡던 그녀. 아직 젖살이 남은 통통한 몸매와 앳된 얼굴마저 문근영의 전성기를 쏙 빼다 박았다. 문근영이 귀여움 하나로 2004년의 신드롬을 만들었듯 이 영화를 이끄는 원동력 역시 심은경의 사랑스러움, 그녀의 청춘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귀여움으로 무장한 영화지만 뜻밖에 이 작품은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으나 서글플 정도로 나이 먹는다는 것의 두려움을 신랄하게 펼쳐내 보인다. 그것이 심은경의 청춘에 반사되어 더욱 아프게 다가왔다. 서른 살이 되면 죽어버릴 거라는 여대생의 다짐을 칠순 노인인 오말순 또한 같은 나이에 중얼거렸었다. 나 또한 어린 시절에 그리고 내 주변의 많은 친구도 스무 살 아니 혹은 서른 살이 되면 그 직전에 죽어버릴 거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던 시절이 있었다. 그만큼 우리는 늙는다는 것, 노인을 향한 근원적인 공포증을 누구나 가지고 있다. 영화 초반 노인의 이미지를 탑골 공원과 퀴퀴한 냄새라고 표현하던 대학생들처럼 우리가 노인을 경멸하는 것 또한 미래의 동지를 바라보는 공포감 때문일 것이다.

 

 

 

 

청춘 사진관을 다녀온 오말순은 스무 살 얼굴에 정신만큼은 칠순 노인 그대로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그녀를 '신선하다.'며 동경한다. 까탈스런 취향의 피디는 물론 손자마저 그녀의 매력에 빠져들어 위험한 사랑을 하는 장면에서는 얼핏 영화 백투더퓨처 1의 오마주가 느껴지기도 했다. 바로 이전까지 짐 덩어리 취급에 요양원으로 쫓겨날 신세였던,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던 오말순이 스무 살의 얼굴을 갖게 되자 너나 할것 없이 그녀를 원하는 이 서글픈 이중잣대가 애처롭기 짝이 없었다.

 

 

이 영화를 보며 한 번쯤은 울게 될 것이라 짐작했는데 그 눈물의 포인트가 다름 아닌 오말순의 아들, 반현철에게 나온다는 것 역시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오말순의 손자 반지하(진영 분)를 향한 최후의 헌신도 자식 사랑은 결국 내리사랑이며 어쩜 우리가 가진 청춘 또한 거저 생긴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젊음을 물려받은 것이라는 상념에 젖게 한다. 

 

 

 

심은경의 청춘 뒤에 가리어진 노화의 서글픔을 아이러니하게 수상한 그녀를 통해 되돌아본다. 거의 노인 패티시에 가까웠던 한승우(이진욱 분) 피디마저 일말의 감상이나 추측조차 없이 - 그 머리에 꽂힌 핀을 봤음에도! - 웃어넘기는 부분은 판타지로 무장된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리얼한 현실이었다. 그가 '노인의 영혼을 립싱크하는 아이돌의 얼굴'을 찾아다닌 것처럼. 그래. 역시나, 만약 내가 신이라면 청춘을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에 두었을 것이다 - by. 아나톨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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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2.25 19:13

    비밀댓글입니다

    • 반갑습니다.^^ 제 감상이 원작자님의 의도와 어느 정도 맞아 들어갔다니 제가 허투루 작품을 리뷰한 것은 아닌 것 같아 기분이 좋네요. 재미를 위주로 한 오락영화임에도 의외로 서늘한 풍자적 묘사가 눈에 들어와 인상 깊었는데 제가 제대로 본 것이 맞았군요. 영화 초반에 하나같이 할머니의 영혼, 노인의 마음을 찾는 남주인공들의 대사가 참 인상적이었거든요. 우리 할머니가 너보다 노래를 더 잘한다던 손자 반지하와 노인의 소울을 립싱크할 수 있는 아이돌을 찾아보자던 피디의 말들이 마치 복선처럼 현실화되는 부분에서 뜻밖의 섬세함을 찾았었는데. 그럼에도 막상 오 할머니가 진짜 노인으로 돌아오자 누구도 그녀를 원하지 않는 모습이 씁쓸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완성된 영화도 재밌었지만 작가님의 의도가 그대로 담긴 작품 또한 궁금해지네요.

  • 아이 너무 재미당 ^^

 

 

철이 좀 들고나서 모든 영웅은 슬프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영웅을 움직이는 조종사의 상처를 알게 된 거였다. 브루스 웨인의 메시아 콤플렉스, 악몽을 꾸는 토니 스타크. 하지만 더 나이를 먹고 보니 진짜 슬픈 건 정직해서 가난한 영웅이었다. 가여운 피터 파커는 그 능력을 갖추고도 전 재산이 730원인 프리랜서 사진가다.

 

 

 

그런데 여기 피터 파커보다 더 불쌍한 남자가 있다. 그 이름 하야 로보캅 그리고 알렉스 머피. 피터 파커보다는 안정적인 직업의 미국 경찰이지만 토끼 같은 아내와 여우 같은 아들을 가진 가장의 족쇄가 있다. 책임져야 할 군식구가 없는 피터 파커의 너름엔 비교도 안 된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그를 비참하게 하는 건 그의 능력은 그가 만든 능력이 아니라는 점에 있었다. 로보캅 아니 알렉스 머피는 알려진 영웅 중 유일하게 능력을 렌탈한 인물이다.

 

적당히 눈 감고 넘어가는 무용지물이 넘치는 경찰국에서 홀로 쓸모있는 경찰이라 오히려 눈총을 받는 열혈 형사 알렉스 머피. 이상하리만큼 경찰마저 쉬쉬하는 발론 일당을 동료 루이스와 멋지게 엿먹인 이후 그의 불운은 똬리를 틀었다. 그를 두려워한 마피아의 우두머리가 누군가의 사주를 받아 자동차 폭탄을 설치한 것이다. 화염에 몸이 타들어 간 알렉스 머피는 시신을 부활한 원작 로보캅과 달리 머리와 가슴 그리고 오른손은 건질 수 있었다.

 

 

 

이 영화에서는 참으로 그로테스크한 장면이 두 서너 번 등장하는데 끔찍해서 눈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슬픈 감정을 느끼게 된다. 세 부위밖에 남지 않은 자신의 몸을, 울먹이는 눈으로 바라보는 알렉스의 얼굴이 그중 하나다. 수트 입기를 거부하며 죽음의 자유를 달라고 요구하던 그는 로봇 신체를 제외하면 고작 세 덩이밖에 남지 않는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이를 갈듯 부탁한다. "다시 입혀줘요."

 

그러나 알렉스에게 남은 것은 겨우 건진 신체의 부산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주 체계적으로 알렉스 머피의 인간성을 증명하기 위한 증거였다. 머릿속에 들어있는 것은 그의 뇌였고 그의 가슴속엔 여전히 훌륭하게 뛰는 심장이 살아남았다. 그의 살아남은 손이 굳이 왼손이 아닌 오른손인 이유도 상징적인 의미를 가져다준다. 오른손은 좌뇌의 명령을 받아 움직이는데 좌뇌가 담당하는 것은 논리와 이성이다. 원작에서는 가장 먼저 잃어버리는 오른손을 리메이크작에서는 도리어 살려두었다. 이것은 몸 대부분은 기계의 도움을 받을지언정 그의 선택을 좌우하는 것은 결국 알렉스 자신이라는 의도가 아닐까.

 

 

 

기계인간 소재의 리메이크 작품이지만 영화의 연출은 은유를 주로 이뤄 상당히 감성적인데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 이상으로 이 리메이크 영화에 리메이크된 기존 영화의 OST는 알렉스의 처절한 현실을 은유적으로 묘사해낸다. 아내와 춤을 추던 지난날의 아름다운 기억을 꿈꾸는 그가 프랭크 시나트라의 Fly Me To The Moon을 들으며 부활하는 장면이라든지 - 참고로 플라이 미 투 더 문은 메카 시리즈의 걸작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엔딩곡으로도 쓰였다 -  로봇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지 않는 딱딱한 로봇 사령관 매톡스가 그의 인간성을 조롱하며 틀어댄 노래는 바로 영화 오즈의 마법사에서 양철 나무꾼의 테마송인 If I Only Had A Heart였다. 나에게 심장이 있다면이라니. 이 얼마나 잔혹한 농담인가.

 

알렉스 머피의 유일하게 훼손되지 않은 신체가 "심장"임에도 심장이 없는 양철 나무꾼을 그의 테마송으로 쓴 매톡스 만큼이나 로보캅의 조물주는, 그들의 피조물이 심장을 가진 인격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옴니코프 기업의 사장은 그와 손을 잡자마자 눈앞의 알렉스를 두고 몸값 농담을 한다. 내가 자네 몸에 투자한 돈이 얼마인가를. 짐짓 존중하는 체하지만 같은 인간을 마주 대하는 태도 같지가 않다. 그것은 결국 알렉스 머피의 수트가 그의 소유물이 아니며 대기업의 CEO인 토니스타크와 달리 수트를 빌려 입은 일개 소시민 알렉스는 소유주가 시키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시사하는 셈이다.

 

 

 

이 영화를 보며 가장 안타깝고 서글펐던 장면은 로보캅의 몸으로 가족과 재회한 알렉스가, 이런 아빠를 위해 농구 경기를 녹화해뒀다는 아들과 시간을 보내지도 못한 채 다시 실험실로 복귀해야 하는 장면이었다. 자의의 음식물 섭취가 아닌 타의의 약물을 투여받아야 하는 알렉스의 몸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족쇄가 있다. 얄궂게도 감독은 바로 전 장면에서 누워있는 알렉스에게 각종 호르몬과 약물을 투여하며 "매일 이것을 맞아야 해요."라는 대사를 넣는다. "항우울제도 투여해줘. 좋은 꿈 꾸게." 그를 배려한 노튼 박사의 전언이 오히려 슬펐다.

 

이 영화는 히어로물이면서도 그런 영화 특유의 미국 찬양이 없다. 오히려 미국의 공권력을 향한 촌철살인의 비판 의식이 엿보이는 영화다. 영화는 처음 이라크 현지에서 활약하는 옴니코프사 로봇 경찰의 활약을 보여주는데 쇼의 사회자 팻 노박의 찬사와는 달리 중동 국가 주민을 보호한답시고 감찰하는 과정이 지극히 권위적으로 비추어져 거부감을 느끼게 한다. 공영화된 경찰 인력을 사기업인 옴니코프와 그들을 지지하는 국회의원을 내세워 그럴듯한 감언이설로 국민을 꼬드기는 모습은 미국 내에 팽배한 민영화 추진을 비난하는 어조로 읽혀 통쾌하기 짝이 없다. 특히 우스꽝스러운 목소리로 미국의 공권력을 찬양하는 팻 노박의 외침은 세계 경찰국가를 자청하는 미국의 패권주의를 조롱하는 것처럼 느껴져 섬뜩했던 부분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비춘 냉소적인 현실은 앞서 말한 것처럼 비록 영웅일지라도 피해갈 수 없는 자본주의의 냉혹함이다. 억만장자 배트맨과 아이언맨의 고민은 주로 과거의 트라우마나 내면 세계의 성찰에서 비롯되지만 가난한 영웅 로보캅의 고난은 낭만이 사라진 현실에서 나온다. 그야말로 먹고사는 고민 말이다. 가장의 무게, 눈 감고 넘어갈 수 없는 비리로 점철된 조직, 수트값을 놓고 내 인격을 좌지우지하는 사람들. 토니 스타크의 수트는 내 자본과 내 능력으로 만들었기에 자비스가 탑재된 나의 의지로 움직일 수 있었지만, 국회의원과 자본가의 철저한 이해타산으로 만들어진 알렉스 머피의 '빌려 입은 수트'는 감정과 인격마저 제한당하게 된다.

 

배트맨의 유산도 스파이더맨의 자가 능력도 아닌 모조리 렌탈된 수트와 능력이지만 고작 2퍼센트 남은 호르몬으로 자유의지를 되찾고 정의 사회를 구현하는 로보캅을 보고 있노라면 그야말로 이 시대가 바라는 진정한 의미의 영웅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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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2

  • 답답이 2014.02.24 09:55 신고

    닥터콜님의 글을 좋아하는 1인입니다..
    내가 보지 못한 것을 보는 혜안도 혜안이지만 풀어나가는 글솜씨에 매번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혹시 또하나의 약속....에 대한 리뷰를 쓰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영화를 보고 그냥 콜님의 리뷰가 읽고 싶은 생각에 부탁드려봅니다.

    • 또 하나의 약속. 한 번쯤 봐야지 하면서도 지나쳤던 영환데 다시금 일깨워주셔서 고맙습니다. 조만간 짬을 내서 보고 올게요.^^

 

 

이맘때였나. 재상영한 빨간 머리 앤에서 급기야 나를 울리고 말았던 내레이션 한 구절이 있다. 송곳을 닮은 블루엣 부인 댁으로 향하던 마차에서 마릴라의 청에 따라 부모님을 잃고 난 이후, 고아 소녀의 과거를 회상하던 앤. 그녀의 이야기는 종종 꿈꾸는 얼굴 속 망상 위를 머무느라 샛길로 빠지곤 했지만 마릴라는 드물게도 앤을 채근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사려 깊은 해설자의 목소리로 풀이된다. ‘앤의 이야기는 그녀의 상상 때문에 간혹 도랑으로 빠져버릴 때가 있었지만. 그것은 이 가혹한 과거를 회상하는 앤에게 있어 일종의 휴식 같은 것이었다고.’

 

아. 이 얼마나 서글프게 사랑스러운 이야기인가. 이를테면 우리가 낭만적이라고 말했던 앤의 상상력은 그녀의 고단한 삶을 잊기 위한 도피처였던 셈이다. 소공녀의 세라 크루가 ‘하는 셈치고' 라며 초라한 다락방을 공주님의 침실로 바꾸었듯이. 이야기의 주인공 월터 미티 또한 상상을 한다. 그것은 앤의 도피 행각이나 세라 크루의 마인드 컨트롤과 다를 것이 없었다.

 

 

 

 

 

가족들에게 ‘멍 때리기’로 불리는 월터의 버릇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현실의 공간을 판타지의 세계로 바꾸는 것이었다. 회사 휴게실의 공간을 반으로 쪼개 눈 덮인 산등성이를 불러들이고 그 자신은 설원의 등반가가 되어 짝사랑 중인 직장 동료, 셰릴 멜호프에게 고백을 한다. 하지만 이토록 과감한 상상 안의 월터 미티와 달리 현실의 월터는 웹페이지 속 그녀의 사진에 하트 버튼을 누르는 일조차 망설이는 소심가였다.

 

때론 재수 없는 상사에게 펀치를 먹이기도 하고 차가 달리는 도로 위를 스케이트보드처럼 미끄럼 타는 월터의 기상천외한 상상들. 그 화려한 상상력에 마냥 탄성을 자아낼 수 없는 까닭은 그의 상상이 결국 이룰 수 없는 욕망의 대리만족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고 그것은 월터만이 아닌 대부분의 우리들에게 해당하는 슬픔이기 때문이다. 모험가의 욕망을 차단하고 타인의 욕망을 현상하는 16년 차 포토 에디터 월터 미티의 삶은 안전한 만큼 공허했다.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늘 그러하듯이 월터의 버릇은 놀림거리가 된다. 상상에 빠져 지각을 하고 화관을 벗어내지 못한 앤이 선생님에게 모욕적인 놀림을 듣고 학교를 그만뒀던 것처럼. 라이프 매거진의 신조조차 기억 못 하는 새 사장은 근본적으로 월터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본능적인 거부감으로 월터의 행동을 시시콜콜 관찰하며 힐난하던 그에게 월터 미티는 데이빗 보위의 노래처럼 우주의 괴짜 같은 인간일 뿐이다. 물론 월터는 빨간 머리 앤처럼 스스로 회사를 그만두는 행동력조차 갖추지 못했다. 이런 그에게 한 가지 희망이란 ‘우주 비행사 톰’은 무척이나 진취적이고 아름다운 노래라고 응답해주는, 아름다운 그녀 세릴 멜호프의 응원이었다.

 

완성도라는 측면에서 이 영화를 평가해보라면 초라해지기 이를 데 없다. 호흡조절이 고르지 못해 관객 대부분이 초장에 잠투정을 해댈만한 영화다.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너무나 원론적이다. 하지만 나는 두 가지 이유만으로도 이 작품을 볼만한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나는 후반부에 보상처럼 펼쳐지는 숀 오코넬이라는 사람의 인간성이며 하나는 월터를 둘러싼 유사관계의 세밀함이다.

 

모히칸 머리를 하고 스케이트보드를 안고 있는 유년 시절의 월터 미티. 세릴은 이런 파격적인 머리를 부모님이 허락했느냐고 놀라지만 그는 도리어 어린 아들의 머리를 손수 밀어주신 분이 아버지였다고 말한다. 상상으로 대리만족할 필요가 없었던 유년의 어린 모험가 월터의 정체성은 모두 아버지의 독려 위에서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관계는 16년간의 파트너, 사진작가인 숀 오코넬과 필름 현상가 월터 미티의 관계 속에서 되풀이된다.

 

 

 

그를 모험가로 키워냈던 아버지의 독려는 이제 함께 찍은 사진 외에 남아있는 것이 없지만 숀오코넬은 마치 아버지의 부활처럼 사진 속에서 손짓하며 그를 모험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결국, 월터 미티는 모험의 정수가 담긴 25번째의 사진을 찾아, 사진 속의 그가 전하는 손짓의 이끌림을 따라 그린랜드로 떠난다. 라이프사의 메시지를 관통하며 표지의 주인공이 되는 순간, 드디어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이 유사 부자 관계의 대물림이 흥미로운 것은 월터의 자극제이자 그를 슈퍼맨으로 상상하게 하는 월터의 뮤즈, 세릴의 아들에게도 그대로 되풀이 된다는 점이다. 멘토가 없어 성장하지 못했던 그녀의 아들에게 과격한 스케이트 보드의 기술을 가르치며 모험심을 독려하는 모습은 그가 아버지에게 배운 것. 혹은 숀오코넬에게 자극받은 것이었다.

 

비록 이런 모험가를 삶의 틀 속에 가두고 파파존스 유니폼을 입힌 채 컵을 치우게 했지만 꿈과 모험의 세계에서 헤매다 놓쳐버린 현실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릴 뻔한 월터가 결국 어머니가 챙겨준 1할의 현실로 완벽해지는 과정 또한 인상적인 부분이었다. 무엇을 해도 다치지 않는 상상 속의 모험과 달리 현실의 모험은 싫은 것과 위험한 것을 모두 포함한 것이기에 현실을 온전히 등한시할 수가 없음을 그의 어머니는 일깨워주고 있었다.

 

 

 

비록 모험을 주된 이야기로 담고 있지만 이 영화의 메시지는 모험하지 않는 삶을 조롱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이 영화가 담은 최후의 아름다움은 일상 속에서 크고 작은 모험을 상상이라는 대리 체험으로 남겨두고 타인의 모험을 현상중인 수많은 예비 모험가들에게 바쳐진 위로였으니까.

 

그가 모험을 떠난 동안 재수 없는 상사의 공격을 그대로 감당했을 후배와 이 정도의 애프터서비스라면 연간 천 달러를 내도 아깝지 않겠다 싶었던 중매 사이트, E 하모니. 심지어 외모마저 닮은 그들이 모험가 월터의 삶에 어떤 역할을 맡았는가를 살펴보는 것 또한 이 영화의 깜찍한 재미다.

 

마치 카운슬러처럼 요즘도 상상을 하나요? 라고 묻는 E하모니의 사장에게 월터는 신기하게도 최근에는 상상하는 일이 줄었다고 답한다. 모험이 그의 삶으로 녹아들었기에 상상으로 대리만족할 필요성이 사라진 것이다. 앤이 더 이상 부풀린 소매를 상상하지 않아도, 빨간 머리를 싫어하지 않아도 되는 풍요로운 어른으로 성장했을 때 그녀의 상상 또한 줄어든 것처럼.

 

 

 

 

 

유년시절 월터의 아버지가 그의 모험심을 독려한 것처럼 숀오코넬은 파파존스와 Life 안에 갇혀있던 월터의 모험심을 이끌어냈다. 아버지, 월터미티, 숀오코넬. 세 사람에게 흐르는 뜨거운 모험가의 피. 너무 아름다워서 사진으로 담아두는 것조차 망설여지는 순간을 직접 눈으로 새기는 것. 그것이 바로 모험을 하는 이유가 아닐까. 그래서 숀 오코넬은 진정한 모험의 순간엔 사진가의 탐욕마저 내려놓는다. 그는 진짜 모험가이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목적이니까.

 

 

 

세상을 보고 무수한 장애물을 넘어 벽을 허물고 더 가까이 다가가 서로를 알아가고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목적이다.


“To see things thousands of miles away, things hidden behind walls and within rooms, things dangerous to come to, to draw closer, to see and be amaz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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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사의 프로즌(Frozen). 겨울왕국은 개봉 전부터 큰 관심을 받았던 영화입니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이 만화를 평가하는 분위기가 디즈니 그 이상의 무언가였다는 점이죠. 마치 이름있는 감독의 대작을 고대하는 분위기가 낯설기까지 했던 프로즌. 그도 그럴 것이 제게 동화 눈의 여왕은 가장 리메이크를 고대하는 고전이었고, 그럼에도 공개된 그림은 3D였으니까요. 어린 시절 가장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미키마우스의 판타지아라고 답했고 생애 이루고 싶은 꿈이 디즈니랜드를 방문하는 것이었던 제게 디즈니는 제외할 수 없는 향수로 남아있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2D가 아닌 3D의 디즈니는 참 받아들이기 괴로운 부분이더군요. 겨울왕국이 펼쳐지기 전 디즈니는, 2D와 3D를 넘나드는 미키 친구들의 단편 애니메이션을 끈덕지게 보여줍니다. 마치 3D 포비아인 저를 위로하듯이 말이죠.

 

 

 

눈의 여왕, 이 아름다운 안데르센의 고전을 디즈니 2D 시절에 복원하지 못했음을 못내 아쉬워했습니다. 진작에 만들지 그랬느냐고 투덜거렸지만, 나름 디즈니에게도 고충의 역사를 거쳐온 리메이크였더군요. 무려 70년 치의 고충이 담긴 캐릭터, 눈의 여왕 즉 엘사는 1940년대부터 리메이크를 기획했던 작품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디즈니가 이 동화의 리메이크를 망설이며 무려 62년을 저 깊은 눈 속으로 동면시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엘사의 캐릭터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 고민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많은 고심과 망설임 끝에 완성된 엘사, 눈의 여왕. 그것은 결국 이 캐릭터가 70년 치분의 공이 들여진 인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엘사는 그것이 충분히 수긍될 정도의 완성도를 보여주었습니다. 여동생 안나와 함께요. 엘사와 안나는 겔다였다가 어느 순간은 카이가 되기도 하며 눈발을 날리며 외로움, 그 안에서 살아가는 눈의여왕의 모티프를 이어갑니다. 그녀들은 디즈니가 지난 80년 동안 단 한 번도 제대로 시도하지 못했던 진정한 의미의 페미니즘을 실현한 공주님들이었습니다.

 

 

 

디즈니가 여태껏 이만큼의 공을 들인 적이 없었노라고 말할 만큼의 열의가 느껴지는 아렌델 왕국의 아름다움은, 배경이 된 노르웨이의 수려함을 환상적으로 리메이크했습니다. 풍부하고 부드러운 색감. 가슴이 아릿할 만큼 빛으로 물들어가는 계절의 색채. 푸른빛이 감도는 얼음 왕국의 청아함이나 주근깨가 콕콕 박힌 장밋빛 볼의 안나의 그 사무치는 사랑스러움이라니. 그것은 저의 3D 거부증마저 굴복시킬 만큼의 3D의 미학을 드러내는 장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눈의 왕국의 3D가 감동적이었던 것은 실사화에 집착한 것이 아니라 만화의 미덕을 그대로 살린 3D였다는 사실이죠.

 

 

 

하지만 무엇보다 이 만화가 위대한 것은, 디즈니 최초의 여성감독이 만들어낸 디즈니의 가치관을 뒤엎어버린 이야기였습니다. 이 만화는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벗어나지 못했던 디즈니 공주님의 '사랑'을 보다 포괄적인 의미의 '사랑'으로 확대한 작품입니다. 평단의 극찬이 쏟아진 것도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마법을 푸는 주체를 향한 혁명 때문이었죠.

 

 

 

손끝으로 겨울을 불러내는 신비한 마법의 힘을 가진 공주님 엘사. "눈사람 만들기 놀이할래?" 사랑스러운 여동생, 안나를 위해 눈사람과 눈의 결정을 만들어주며 즐거워하는 그녀. 안나만큼이나 자신의 힘을 사랑하는 엘사였지만 한순간의 실수로 여동생의 눈에 상처를 입히고 나선 그녀의 힘은 저주로 명명되고 맙니다. 부모님은 엘사를 향해 권고합니다. "내색하지 말고. 감정을 드러내지도 말고. 착한 아이로 있어야 해." 결국 엘사는, 있는 그대로의 그녀를 사랑하는 유일한 사람, 안나 마저 트롤의 마법으로 잃어버린 채 감정을 감춘 외톨이로 살아가게 됩니다. 부모님이 건넨 장갑을 끼고 힘을 감추고 감정을 감추고 내색하지 않는 착한 아이로 그 오랜 기간을 살아가게 된 거죠. 엘사에겐 오히려 얼음으로 지어진 자신의 궁전보다 이 시기의 아렌델 성이 더욱 얼어붙은 눈의 왕국으로 느껴졌을 겁니다.

 

 

'착한 아이'로 살아가라는 아버지의 잔혹한 명령. 디즈니는 흥미롭게도 겔다와 카이 그리고 눈의 여왕을 자매들만의 이야기로 재창조해냈습니다. 얼음조각이 눈에 박힌 안나의 해프닝은 마치 트롤의 거울 조각이 눈에 박힌 카이와 닮아있지만 정작 세상을 차단하게 된 건 언니 엘사였죠. 엘사는 겔다를 상처입히는 것이 두려운 카이이자 슬픈 눈의 여왕이었습니다. 초반 남녀의 로맨스가 아닌 자매의 서사만으로 벽 하나를 두고 등을 맞댄 채 서글픔을 이끌어내는 장면에서는 그야말로 전율이 스며들 지경이었습니다.

 

 

 

이제껏 디즈니사의 애니메이션 속 여주인공들은 오드리 헵번의 프린세스 앤과 닮아있었죠. 무료한 성을 빠져나가 로마에서 아이스크림이라도 핥고 싶은 것이 여주인공이 외치는 혁명이었고 그것을 구원하는 주체는 주로 처음 만나는 왕자님 역할의 누군가 때문이었습니다. 얼핏 진취적으로 그려집니다만 해결해나가는 방식은 고리타분하기 짝이 없었죠. 명확히 말하면 여주인공이 주체가 되어 스토리를 이끄는 공주님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디즈니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에요. 동화의 서사가 그랬으니까요.

 

 

 

겨울왕국이 동화 눈의 여왕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인듯하면서도 가장 완벽한 리메이크인 이유는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이 가진 미덕을 너무나도 제대로 해석해준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이 눈의 여왕은 드물게도 여자가 기사가 되어 남자를 구하러 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으니까요. 심지어 카이를 붙들어둔 존재 역시 동화 역사상 최고의 카리스마를 자랑하는 눈의 '여왕'입니다. 그 와중에 유일한 남자역인 카이는 성안에 갇혀 의식을 잃은 채 행동을 제한당하고 다른 누군가 마법을 풀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여태껏 수많은 동화 속에서 그리고 디즈니 속에서 공주님에게 맡겨진 역할이었죠.

 

 

 

사실 프린세스 안나 또한 여타의 공주님들과 다를 바 없어 보였습니다.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진 것은 외톨이로 남은 엘사였고 첫눈에 이웃 나라의 왕자님과 사랑에 빠져 사랑이 모든 것을 구원하리라를 노래하는 안나의 서사는 로마의 휴일에서 멈춰있는 걸로만 느껴졌었죠. 하지만 그녀가 선택한 최후의 가치는 이 만화가 왜 디즈니의 혁명이라고 불리며 평단의 극찬을 받을 수 있었는가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탑에서 머리칼을 늘어뜨리고 왕자님을 기다리며 저주를 풀어줄 것을 염원하는 수동적 공주님에서 벗어나 스스로 구원하는 존재로 거듭난다는 스토리는 디즈니의 혁명이자 공주님의 혁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장면이었으니까요. 안나가 구차하리만큼 목숨을 구걸하는 장면이나 선택의 순간에 찰나의 망설임이 드러나는 얼굴은 이 만화가 얼마나 꼼꼼하게 서사를 그리려 노력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처음 만난 남자와 결혼은 안 돼!" 심지어 이 만화에서 그려내는 이웃 나라 왕자님의 이야기는 일종의 블랙코미디로까지 느껴지기도 합니다.

 

 

 

 

눈의 여왕이 증명하는 스토리의 힘은 이런 만화에는 꼭 등장하는 참견쟁이 감초 캐릭터, 눈사람 울라프의 사랑스러움에서도 드러납니다. 사실 울라프는 외형적으로 그리 아름다운 캐릭터는 아닙니다. 귀엽지도 않고 사랑스럽지도 않죠. 오히려 첫인상은 다소 비호감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어요. 하지만 스토리가 거듭되면서 그의 천진할 정도로 순수한 마음을 알게 되면 그 어떤 캐릭터보다 사랑스러운 존재인가를 사무치게 깨닫게 됩니다. 이 만화를 보면서 세 번 울었는데 그 귀중한 한번은 너무나 서글픈 이야기를 웃으면서 말하는 월도프의 순수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디즈니의 혁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눈의 여왕이 그의 안배를 정말 디즈니답게 마무리했음에도 상투적이라는 생각은커녕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게 될 정도더군요. 이게 바로 스토리의 힘이죠.

 

 

 

엘사의 마법은 우리의 신 내림과도 닮아있었죠. 밀어내고 거부하고 내 것이 아니라고 외면하자 그녀를 괴롭히기만 했던 마법의 힘이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라 인정하며 받아들이고 사랑함으로써 축복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이 순간은 디즈니 만화가 공통적으로 제시했던 '사랑의 힘'의 규모가 얼마나 웅장해졌는가를 실현하는 장면이기도 했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겠노라고 부모님과 아렌델 왕국 그리고 자신에게 선전포고하는 듯한 엘사의 노래, let it go는 화면을 뚫고 나와 디즈니를 향한 다짐처럼 아로새겨집니다. 더이상 완벽한 소녀는 존재하지 않아.

 

 

"난 더이상 그들이 뭐라든 상관하지 않아. 폭풍아. 몰아쳐라. 완벽한 소녀는 사라졌고 난 여기 빛 속에 있어." 만약 제게 딸이 있다면 신데렐라나 라푼젤, 잠자는 숲 속의 미녀가 아닌 이 작품의 엘사와 안나를 소개해줄 것입니다. 내색해도 괜찮아. 감정을 드러내도 괜찮아. 완벽한 소녀가 되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글의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자료의 저작권은 해당 제작사와 신문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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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9

  • 시현 2014.01.23 08:42 신고

    아직 책으로도 보지 못한 작품이라서 ;;
    이번 기회에 한번 직접 보고나서 리뷰를 다시 한번 읽어 봐야 겠네요 ㅎㅎ

    •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도 기회가 닿는다면 읽어보세요. 뭉클한 감동이 있답니다. 이미라 작가의 리메이크도 괜찮아요. '겔다를 찾아서'

  • 이 작품이 정말 화제가 많이 되고 있군요.
    시간이 나면 직접 극장에 가서 한 번 보고 싶은데... 말이죠...ㅎㅎ/

  • 자매 2014.01.24 08:42 신고

    저 역시 판타지아를 보며 자란 사람으로서 이번 애니는 그 때 그 감동을 다시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친 언니와 어색하게 극장에서 엘사와 안나의 이야기를 듣는데. 특히 초반의 안나 이야기에서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더군요.(옆을 돌아보니 언니도 분명 운 것 같습니다만 티를 안내서 모른척했습니다)
    리뷰를 읽고 나니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을 한 번 꼭 읽어봐야할 것 같습니다.
    60년이 넘게 고민했을 가치관의 혁명을 제대로 느껴보고 싶어지네요
    생각하게 해주는 리뷰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잘 읽고 갑니다!

  • 애니매이션이라서 아이들만 보는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아니였나봐요ㅋㅋ
    요즘너도나도 겨울왕국 재밌다고 꼭보라고하네요 ㅋㅋ
    시간내서이번주말에 꼭봐야겟어요^^

  • wish 2014.01.26 23:31 신고

    주말...궂은 날씨때문에 눈썰매장을 포기하고 선택한 영화였죠~~^^
    전 아들도 있고 딸도 있는데요...
    두녀석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영화를 찾는게 무지 고민스럽거든요.. 이쁜공주만을 원하는 딸..깔깔 웃을 수 있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아들...
    눈의왕국은 두가지 요소를 다 갖추고 있는거 같아요...거기다 엄마의 감성을 깨우는 아름다운 노래도 있죠~~
    오랜만에 만나는 즐거운 영화였답니다~~
    콜님 리뷰로 만나니 더 반갑네요

  • wish 2014.01.28 14:30 신고

    콜님~~^^
    혹시 소설 리뷰는 안쓰시나요?
    응사때문에 우연히 들른 공간이었는데 지금은 매일 들러 새로운 글들...지나간 리뷰들 읽게 되었네요..
    콜님과 소통할 공간도 있었음 좋겠어요~~^^
    오늘아들녀석과 서점에 갔다가 '상실의
    시대'를 샀어요..20대때 우연히 도서관에서 잠시 빌렸다가 앞부분만 몇장 넘기고 덮었던 책이었는
    데...개인적으로 일본소설에 그닥 공감하지 못했던 나름의 편견이 가득했던 시절이라 제대로 읽지도 않았었죠..
    콜님 리뷰를 읽으면서 한번은 꼭 읽어야겠다 생각했었는데 오늘 눈에 들어오더라구요.
    아들녀석이랑 커피숍에 들어와 책 펼치기 전에 콜님께 보고하는 중이랍니다.
    제가 보는 상실의 시대..제가 느낄 상실의 시대가 과연 콜님의 감성을 따라갈수 있을까 궁금해서요.
    이제까진 내가 느끼는 감정이 제일 중요하다 생각했는데 요즘은 콜님의 시선이 너무 궁금하답니다~~

  • 꽃섬 2014.01.30 10:01 신고

    아무 생각없이 예매했다가 더빙판을 보게 됐지요.
    음향의 질이 떨어짐은 물론 음악의 감동도 반쪽이 되어버렸어요.
    어떻게 이 상태로 영화를 틀지 화가 나더군요.
    그런데 영화는 이 불만을 누그러뜨릴 수 있도록 기가막힌 전개와 전복적인 여성 모티브들의 연속이였습니다.
    겨울과 봄을 공존케 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의 가치를 믿으며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엘사의 놀라운 힘이
    드디어 공존을 가능하게 하지요.
    엘사와 안나는 여성들이 가진 두 가지 면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다시 봐야겠어요.
    이번엔 반드시 원판으로...

    참 그리고 콜님 글 늘 감사히,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그래비티는 영화가 인간에게 미치는 유익한 영향 중에서 가장 생산적인 즐거움을 선사하는 영화입니다. 그것은 바로 돈 주고도 못살 간접경험이죠. 이토록 서슬 퍼런 우주 유영의 대리체험이라니. 또한 그래비티는 퍼시픽 림과 더불어 매니아가 생산자로 성장할 때 어느 정도의 힘이 발휘되는가를 증명하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메카 매니아의 한풀이라 느껴졌던 퍼시픽 림. 그리고 우주 비행사를 꿈꾸었던 남자의 우주적 매니아성이 발현된 영화가 바로 그래비티죠.

 

 

 

그래서 관객은 감독이 기원한 "카메라를 우주로 들고 가 직접 촬영한 듯한 느낌"을 그대로 체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역시 부유하고 창의적인 매니아의 덕심은 전 세계를 이롭게 한다니까요. 형체 없는 미지의 어둠을 동글동글 유영하는 산드라 블록.. 하지만 이 영화가 수작을 넘어 걸작의 수준으로 끌어올려 진 것은 1억 달러의 제작비나 경이로운 20여 분의 롱테이크씬과 같은 기술력뿐만이 아닙니다. 그래비티가 정말 잘 만들어진 영화인 이유는 그 어떤 우주 영화보다 함축적인 메시지를 담은 각본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매니아의 궤적이 느껴지는 상징적 메시지를 흩뿌려두었음에도 일말의 군더더기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스토리에 치중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담백한 영화라고 느껴질 정도죠. 이 영화의 제목인 그래비티는 막상 영화 속에선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만큼 사무치게 중력의 존재감을 되새겨본 경험 또한 처음이었습니다. 영화 속에서 중력은 갖가지 상징적 의미로 등장하는데요. 그중에서도 인상 깊었던 것은 라이언 스톤과 매트 박사의 로맨스 아닌 유대감이었습니다. (그들을 헐리우드 로맨스로 만들지 못해 안달 났었다는, 워너브라더스사의 경악스러운 센스에 박수를 보냅니다...)

 

 

 

아들을 원했던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라이언이 마치 탯줄 같은 연결 끈으로 매트에게 묶여 멘토링을 받는 광경. 붙잡아두는 것. 바로 인간이 탄생하기 전부터 선사 받은 생명의 기원이죠. 덧붙여 영화 속에서 중력은 한 인간의 심리 상태를 묘사하기도 합니다. 멘트를 잃은 라디오와 목적이 없는 드라이브..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의 상태를 무중력 공간의 침묵으로 묘사한 감독의 대범한 표현력에는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비티의 여주인공 산드라 블록은 제작진이 원한 첫 번째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제작진은 처음 안젤리나 졸리를 원했고 그다음엔 나탈리 포트만을, 그리고 두 번의 퇴짜로 선택된 주인공이 바로 산드라블록이었던 셈이죠. 그녀여서 다행이다 싶은 것은 무엇보다 아직까지 제겐 스피드의 산드라 블록이 주는 상징성이 존재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타의에 의해 무의미한 드라이브를 반복해야 했던 스피드의 그녀가 그래비티의 유영자라니..

 

 

 

오락 영화의 관점으로 볼 때 그래비티는 분명 모두를 만족시키는 영화가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재미있는 영화는 저 하늘의 별만큼 많아도 인생관을 돌이키게 하는 영화는 일년에 한 번도 만나기 어렵죠. 그래비티는 분명 그 후자에 속하는 작품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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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0.24 09:46 신고

    로맨스나 회상씬을 뿌려댔다면 그저 평범한 영화가 되버렸을텐데...워너의 압박에 굴복하지 않은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뚝심에 박수를 보냅니다.

  • 우주를 유영하며 들리는 긴박한 숨소리가 더 영화를 긴장감있게 보게 한 것같아요~ㅎㅎ

  • 영화 시작부터 영화가 종료되기 직전까지 지상을 한 번도 안보여 준것은 좋은 판단이었던 것 같습니다. 관객들이 충분히 우주를 느끼고 무중력을 대리체험할 수 있게끔 해주었죠, 혹여나 휴스턴 지상통제 센터가 중간에 나왔다면 대리체험에 관객들이 집중하는데에 방해가 되었을 겁니다. 제 블로그에도 그래비티 관련 글이 있는데 방문 부탁드립니다.

  • ㅇㅇ 2016.01.17 10:30 신고

    인생관을 돌이키게 하는 영화라는데서 공감해요, 인터스텔라, 마션등 비교되는 sf영화들이 나왔지만 아직까지도 제게 최고의 sf영화로 기억되는 영화는 그라비티에요..! 보고 나서의 여운을 잊을수가 없네요..최선을 다해 살아야겠다..ㅋㅋㅋㅋ!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마 6:13) 옥희 엄마의 기도는 한 대목에서 막혀 맴을 돌고 있었다. 이젠 쳐다만 봐도 낯이 뜨거워지는 사랑방 손님의 존재가 그녀에겐 유혹이며 사탄이었으니까. 중학 시절 교과서의 기억을 빌려 펼쳐다 본 주기도문은 거의 마지막 구절에 가장 애틋한 외침을 남겨두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보다 근원적인 의문을 갖게 된다. 방식은 제각각이지만 원리는 같다. 사탄의 시험이라는 것은 결국, 인간이 자신과 같은 성질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증명일 뿐이다. 도대체 왜 이렇게 귀찮은 짓을 하는 것일까? 딱히 이득을 볼 것도 아니고 오히려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말이다.

 

어느 생물은 어미의 살 속에서 태어나 그 살덩이를 뜯어먹으며 자라나 어미가 죽고 나서야 빛을 보게 된다. 이것에 바로 생명체의 본능이자 기원이다. 종족 번식의 욕구. 혹은 열망. 그것은 바로 증명. 오. 신이여. 여기 나와 똑같은 것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나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다섯 명의 아버지를 가진 소년 '화이'의 설정을 들었을 때 문득 어느 프랑스 영화의 제목이 스쳐 지나갈 만큼 달콤한 상상을 했지만, 그 결과는 피비린내가 풍길 만큼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화이는 유괴된 소년이었고 자신을 유괴한 다섯 명의 아버지를 가졌다. 물론 그들 또한 여느 아버지와 다르지 않은 훈육을 한다. 다만 장난감 대신 칼을 쥐여주고 사회성이 아닌 살육을 가르쳤을 뿐이다. 그들은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을 모두 화이에게 물려주었다. 화이는 나무의 뿌리처럼 아버지들의 양분을 빨아들이며 자라난다.

 

 

 

캐릭터 화이가 아버지의 양분을 빨아들인 것처럼 그를 연기한 배우 여진구 또한 다섯 선배님의 각기 다른 연기관을 꼬약꼬약 받아먹고 성장한 것 같다. 영화 화이의 캐스팅은 감독이 배우의 연기력에 거는 기대치가 얼마인가를 보여준다 싶을 만큼 호화롭기 짝이 없다. 내가 여진구에게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럼에도 무색하지 않은 만 16세 소년의 존재감이다. 등장인물과의 가장 많은 1:1을 주고받은 여진구는 각 신마다 상대가 필요로 하는 애티튜드를 갖췄다. 그는 결코 극의 치어리더나 마스코트 따위가 아니었다.

 

 

 

특히 김윤석의 연기력이란 축약의 미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군더더기 없는 연기를 보여주는데 포스터에도 암시된 그분과의 대결에서 팽팽하게 맞서는 1997년생 따위가 나는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보다'나 '만큼'은 아니더라도 결코 초라하진 않았다. 이토록 완숙한 열일곱이라니. 아마 이 아이는 10년 뒤엔 대중을 놀라게 할 것이고 그리고 또 10년 뒤엔 대중을 압도할 것이다. 소년의 미래가 두려우리만큼 이미 완성된 배우 여진구의 존재감은 현재 충무로를 휘어잡은 하정우의 영향력을 연상하게 했다. 포스트 하정우로서의 가능성.

 

화이의 부친들이 그러했듯이 제작진 또한 영화의 양분을 먹고 자라난 그에게 성취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배우 여진구의 존재는 화이의 또 다른 결과물이다.

 

 

덧. 눈치가 좀 보이더라도 영화의 마지막까지 아낌없이 훑고 나오십시오. 이 영화의 감상은 엔딩 크레딧에서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엔딩 크레딧을 무시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감정은 분명 천양지차일 것으로 사료 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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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4

  • 화이에서의 여진구씨의 연기변신 기대되네요~ㅎㅎ

  • 알든 2013.10.11 23:20 신고

    마지막 영상으로 영화가 비로소 완성이 되더군요. 끝까지 보고 나오니 러닝타임 내내 떠돌던 생각들, 아마 인간으로서는 단정하기 힘든 물음들에 대한 장준환 감독의 생각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역시 닥터콜님이십니다ㅎ 끝까지 보고나온 관객과 그렇지 않은 관객의 차이가 분명할 거 같아요 ㅎ

    • 맞습니다. 적어도 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은 그저 명함의 역할이 아닌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관객이 많아서 너무나 안타까웠어요. 영화를 보는 내내 느꼈던 도덕적 관념과 분노, 그리고 의문의 불편한 감정들이 영화의 엔딩크레딧 하나로 모조라 사그라들더군요.

  • 설레발 2013.10.23 08:37 신고

    장준환 감독 지구를 지켜라의 엔딩크레딧이 생각나네요..장감독 보면 다작의 허무함도 느껴지고..꼭 보곳싶은 영화입니다^^

컨저링 영화 후기 공포의 원점을 되돌아보다

 

컨저링을 보고 왔다는 두 지인의 반응은 극과 극이었다. 시시하다. 너무나 무서웠다. 재미있는 것은 공포물을 그리 즐기지 않는 사람의 반응이 전자였던 반면에 상반된 의견의 지인은 공포 마니아였다는 점이다. 이렇게나 아이러니한 컨저링의 반응은 그가 가진 카피에서 이미 암시된 것이었다. '무서운 장면 없이 무서운 영화'

 

컨저링(The Conjuring, 2013)장르공포, 스릴러2013.09.17 개봉런닝타임 112분미국 15세 관람가

출연 베라 파미가, 패트릭 윌슨, 릴리 테일러, 론 리빙스턴, 조이킹

 

 

영매의 기질을 타고난 로레인. 독학으로, 무려 가톨릭 교단의 인정을 받은 악마 연구가 에드 워렌. 이 매력적인 이력을 가진 두 사람이 퇴마사 팀을 꾸렸다는 사실만으로도 구미가 당기는데 심지어 부부라는 사실은 나를 흥분하게 했다. 어디 그뿐이던가. 이게 영화적 상상으로 만들어낸 가공의 이야기가 아니라 실화를 근거로 했다는 사실만큼이나 오싹한 정보가 또 있을는지. 영화는 워렌 부부가 겪은 몇 개의 체험 수기로 관객을 질리게 하고선 점점 스토리의 가장 깊숙한 에피소드로 파고들어 간다. 이 이야기는 워렌 부부가 겪은 가장 사악한 케이스를 메인 테마로 수집했다.

 

 

 

그렇다면 공포 영화 컨저링은 과연 어느 정도의 수준으로 두려웠는가. 공포에 취약한 관객이든 그 반대 성향의 관객이든 가장 염두에 두고 있는 의문일 것이다. 톡 까놓고 말해 그리 충격적인 공포는 아니다. 그것은 이 영화가 제시하는 공포의 지향점이 지극히 폐쇄적이기 때문이다. 컨저링은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충격을 최대한 절제했다. 예를 들어 난도질당하거나 피범벅이 된 살풍경한 살육의 광경 따위를. 컨저링의 공포는 은유적이며 암시적이다.

 

 

 

이 정숙한 공포는 관객에게 눈으로 확인시켜주는 대신 상상할 수 있는 범위만큼의 오싹함을 선사한다. 공포에 울먹이는 아이가 손가락으로 가르키는 무언가. 그것은 분명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관객은 곧 나타날지도 모를, 아니면 이미 머릿속에 나타난 공포의 이미지만으로도 충분히 두려움에 떨 수 있었다.

 

 

 

컨저링은 보이는 공포보다 보이지 않는 공포가 갖는 힘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영화다. 영화 속 대부분의 양식은 이미 우리가 보아왔던 공포 영화의 답습이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스크림과 같은 자학성 코미디가 아닌 지난 공포 영화에 바치는 감독의 진한 경의가 느껴져 나를 설레게 했다. 필요 이상으로 잔인한 최근의 호러물에 바치는 공포의 원점 같은 것을 말이다. 잠든 소녀의 발을 당기는 보이지 않는 손. 심장을 조일 만큼 당겼다가 떨어지는 불온한 효과음. 그만큼으로도 충분히 두려웠던 지난날의 공포를.

 

 

 

무엇보다 살육의 대명사, 쏘우 시리즈를 만든 제임스 완 감독이, 비주얼에 치중한 공포물을 뒤엎은 보이지 않는 공포를 연출했다는 사실이 경이롭기 짝이 없다. 다가섰다가 돌아서야 할 때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효과음과 언제 나타나야 하는지를 정확히 인지하는 BGM. 관객의 숨통을 있는 힘껏 조였다가 잠시 쉴 틈을 안겨주는 사랑스러운 캐릭터의 시도들. 심장을 두드리는 정숙한 박수갈채. 영화 컨저링은 그렇게 말한다. 공포의 원점은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상상하는 힘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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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영된 국내 최고의 토크쇼 놀러와에 초청받은 어느 국내 마술사가 그런 말을 했었다. 해외의 관객들과 비교했을 때 우리나라만큼 까다로운 관객 또한 없노라고. "지금 나를 보고 있나요?" 마술사가 꺼내놓은 마법 동전에 외국 관객들은 눈을 반짝이며 기적을 기다리지만, 우리나라 관객들은 팔짱을 꼬고선 "나는 절대 속지 않는다."는 단호한 의지로 눈을 부릅뜨고 관찰하기 시작한다나. 그런 의미에서 원제 Now You See Me에 굳이 "마술사기단"이라는 부제를 붙여둔 마케팅 부서의 센스는 그야말로 현지화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나우 유 씨 미는 우리가 언제나, 마술사의 마술을 감상하기 이전에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던지는 트릭이다. "자아- 지금 당신은 나를 보고 있어요." 마법 동전이든 붉은 다이아몬드든 간에 마법의 도구를 꺼내놓고 관객에게 주물거리는 한마디. "지금 나를 보고 있죠?" 그리고 반대편에서 준비된 트릭이 마술사가 지시한 방향에서 기적으로 전환되어 튀어나온다. 한마디로 마술사의 트릭이 시작되는 순간은 나우 유 씨 미를 외칠 때부터라는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의 전개가 (아니면 만화든 소설이든 그 어떤 장르든 간에) 지금은 무시 받는 전설의 노인네가 전국 각지의 비범한 꼴통들을 불러모아 한탕 치기를 하는 거다. 그러니까 공포의 외인구단 같은 거. 소풍은 도착했을 때보다 도착지점을 향해가는 순간이 가장 재밌다. 이른바 케이퍼 필름이라고 불리는 이 장르는 한탕을 치는 순간보다는 각 분야의 천재 기술자들이 모여 범죄 계획을 도모해가는 그 순간이 가장 짜릿한데 작년 꽤 화려했던 도둑들 또한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 영화 또한 많은 뉘앙스가 도둑들을 떠올리게 하는데 거기에 마술이라는 환상적인 볼거리를 추가하여 영화는 마치 야밤에 개장한 놀이공원만큼이나 설레고 즐겁다.

 

이런 외인구단 부류의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입체적인 캐릭터의 나열이다. 나우 유 씨 미는 그런 부분에서 이미 50퍼센트는 달성한 재미를 보장하는데 이런 장르가 다 그런 것처럼 하나씩 나사가 풀린 꼴통들이라 더 재밌다. 러블리한 얼굴이 가장 눈에 띌 수밖에 없는 마이클(제시 아이젠버그 분) 화려한 언변에 눈에 띄는 스타성을 가진 연예인 같은 인물이지만 경비원에게 50달러를 먹여 만든 트릭으로 여자를 꾀는 바람둥이다.

 

 

멘탈리스트라는 거창한 직함의 독심술가 메리트 오스본(우디 해럴슨 분)은 휴양지에서 불륜남을 협박해서 돈을 따먹는 비열남이다. 홍일점 헨리는 피라니아떼에 희생당한 것처럼 피 칠갑 된 유리 수조로 관객을 질겁하게 하고는 뒤에서 나타나 "어떤 미친년이 저딴 짓을 해!"라고 자신의 트릭에 조소를 보낸다. 귀여운 막내 잭은 어설픈 유리겔라 흉내로 관객에게 당한척하고는 지갑이 든 재킷과 시계를 통째로 훔쳐 달아나는 절반 이상이 범죄자다.

 

여기에 세상에서 가장 피곤한 얼굴을 잘 짓는 것 같은 남자, 마크 러팔로(딜런 홉스 역)가 FBI가 되어 그들을 뒤쫓는다. 모건 프리먼(태디어스 역)은 이번엔 신도 현자도 아닌 동료 마술사의 트릭을 고발하는 배신자가 되었다. 왜 우리가 어릴 때 한참 인기 있었던 호기심천국 막바지에 나온 타이거 마스크의 그 사람처럼. 나우 유 씨 미는 역설적이게도, 누군가는 기적이라 칭하고 또 누군가는 사기라 말하는 마술을 푼돈 놀음에 사기의 도구로 이용하던 얼뜨기 마술사들을 불러모아 더 큰 사기를 통해 진짜 마술사로 성장시키는 과정을 그려 나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앞에 펼쳐지는 마술이 초자연적 현상이 아닌, 사람의 손길이 닿은 트릭이라는 사실에 분통을 터뜨린다. "속았다."라고. 하지만 마술이라는 것은 초능력도 아니고 성령의 힘도 아니다. 사람이 가질 수 없는 영의 힘을 빌려 만든 기적이 아닌 사람의 재능으로 만들 수 있는 기적을 우리는 마술이라 칭하는 것이다. 그들은 뛰어난 연기와 현란한 트릭으로 시청자에게 기적의 순간을 만들어 보여주는 최고의 엔터테이너이자 예술가이다. 마술은 예술이고 과학이다.

 

나우 유 씨 미는 마술사를 모욕하는 한마디인 사기꾼을 덧입혀 오히려 마술이라는 장르의 존엄성을 일깨워준다. 하나의 씬을 탄생시키기 위해 마술사들이 고안했을 무수한 트릭의 잔상들. 마술사는 에스퍼가 아니다. 또한 간달프나 해리포터도 아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아름답고 위대하지 않은가. 오로지 인간의 상상력과 감수성 그리고 두뇌로 고안된 기적이라니. 내 눈을 들여다보는 마술사가 묻는다. "지금 나를 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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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판 어벤저스, 영화 익스펜더블 2에서는 웃기면서 슬픈 대사 하나가 나온다. 근사한 날것을 준비해주겠다던 약속과 달리 폐품에 가까운 고물 비행기를 가져다 놓은 브루스 윌리스. 박물관에나 갖다 놔야 할 고물이라는 항변에 실베스터 스탤론은 툴툴 웃으며 말한다. "우리도 마찬가지잖아." 레드: 더 레전드는 할배판 어벤져스 같은 영화다. 브루스 윌리스, 존 말코비치, 헬렌 미렌.. 그리고 안소니 홉킨스. 어째 요 몇 년 사이 할리우드의 유행 아닌 유행이 되어버린 듯한 컨텐츠랄까. 왕년의 스타들이 알비 백! 하며 나 아직 안 죽었소 엄지를 치켜드는- 레드2는 그 시류에 흥미로운 볼거리를 하나 더 투입했다. 단순히 왕년의 액션 스타만이 아닌 각 분야에 굵직굵직한 획을 그은 장르의 전설들을 한 무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55년생의 브루스 윌리스를 아무리 전설이라 총칭해도 노쇠한 체력마저 동결시킬 순 없었다. 젊은 날마냥 몸빵이 불가능한 할배들을 모셔다 놓고 액션 영화를 만들어야 했기에 영화는 부수적인 볼거리를 총망라하여 그들을 그럴듯한 액션 스타로 보이게끔 연출한다. CG와 막대한 물량 공세 그리고 젊은 피를 수혈시키기도 하며. 이렇게까지 무리해야 한다면 그냥 젊은 배우를 쓰는 것이 낫지 않겠나 의문이 들기도 하겠지만, 이들이 가진 두 가지 미덕은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그들을 써야만 했던 이유를 설명하고 있었다. 노련함 그리고 친숙함이다.

 

 

 

코믹 액션 영화 레드는 후자보다 전자의 쾌감이 더 크게 좌우하는 영화다. 대사나 상황이 웃게 하기도 하지만 그 웃음을 이끌어나가는 포인트는 무엇보다 웃긴 상황을 연출하는 배우의 친숙함 때문이다. 존 말코비치의 소품처럼 앙증맞은 개그 세레모니들. 격전지를 바꿀 때마다 관광객 흉내를 내며 그 심각한 상황에 러시아라는 텍스트가 여기저기 박힌 옷을 꼬박꼬박 입고 나오는 귀여운 디테일이라니.

 

55년생의 브루스 윌리스가 바보처럼 사랑놀음에 심취했어도 그리 느끼하지 않았던 것은 특유의 이맛살 찌푸린 반가운 표정으로 허니~를 불러주었기에. 어디 그뿐인가. 엘리자베스 2세 역할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따낸 헬렌 미렌이 정신병동에서 왕관을 쓰고 "나는 영국 여왕이다!"를 외치는 장면은 이 영화 최고의 패러디 개그. 한니발 렉터 박사의 물리적 임펙트는 다소 쇠약해졌어도 혼을 쏙 빼놓는 그의 공격성은 여전했었다. 아, 이런 방향으로 공포를 표출할 수 있구나 싶어 반갑기 그지없었던 안소니 홉킨스의 또 다른 이면.

 

 

 

세계적 킬러에게 쫓기고 정부의 표적이 된 위기의 순간에도 파리와 러시아 그리고 영국을 마치 관광하듯 어슬렁대는 액션 할배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깜찍하기 짝이 없다. 아마 조금 더 젊은 캐스팅이었다면 이런 재미는 시도부터가 가당치도 않았을 것. 어디 그뿐이던가. 꽃보다 할배의 관광을 보다 스릴 있게 인솔하는 젊은 피 이병헌의 활약은 기대 이상의 귀여운 볼거리였다. 이제 막 새신랑이라고는 해도 이병헌도 70년생. 중견 배우의 영역에 슬쩍 발 담글 나이인데 55년생의 현역들과 호흡을 맞추니 그야말로 '베이비'더라.

 

 

 

대포급 위력의, 그의 말대로라면 가장 아픈 총을 들고 나와 쑥대밭을 만들더니 내 비행기 타령, 박살 낸 창문의 유리 조각을 구두 밑창으로 우아하게 털고 들어와 또 내 비행기 어딨어 꿍얼거리는 미스터 한의 깜찍한 반전 매력. 멜로면 멜로 코미디면 코미디 어디 그뿐인가. 달콤한 인생에서 한국 배우에게도 이런 느와르 이미지가 나오는구나 싶었던 근사한 총질과 휘날리는 액션. 몸싸움도 수준급이라 적을 수타로 물리치는 손맛은 익스펜더블2의 몇 분만으로도 제대로 된 타격감을 보여줬던 이연걸 못지않더라.

 

 

 

 

울끈불끈 초콜릿 같은 조각 몸매에 브루스 윌리스와 존 말코비치가 몸서리치는 세계 최고의 킬러라는 재미난 설정도 유쾌하기 그지없었다. 외국 영화에서도 이병헌 목소리는 단언컨대 이병헌. "어떻게 해줄까? 어떻게 죽여줄까?" 속삭이는 그의 꿀 같은 목소리는 바로 이병헌이 제안한 애드리브라고.

 

 

 

 

돌아온 오빠야가 녹슨데 없이 건재하길 바랐다. 추억을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돌아온 7080이니 잊지 말자 1997 따위 그리 영롱한 외침으로 느껴지지도 않았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노병은 흠집이 없는 추억이라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다소 녹슬고 낡아있더라도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살고 있기에 아름답다는 것을. 추억은 현재를 쌓아서 전설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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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unjoo 2013.08.24 17:38 신고

    회사 사람들과 보러 간데다 제 취향에서 벗어난 영화
    그렇지만 왠일인 걸, '할배'들의 전성기를 기억하기에 금세 빠져들었어요 ㅎㅎ 말코비치가 이렇게 웃길 수 있는 배우였구나! 하면서요 ㅋㅋ
    물론 단언컨대 이병헌도 이병헌이었구요^^

    • 존 말코비치 정말 귀여웠죠?ㅎㅎ 그 심각한 장면에서 관광객 표시 역력히 나는 옷들만 걸쳐입은 모습이 어찌나 웃기던지 ㅋㅋㅋㅋ 3도 나왔으면 좋겠어요. 정말 유쾌하게 본 영화였어요. 이병헌의 베이비 같은 모습도 너무 귀여웠구요.ㅠㅠ 이마에 얼음 주머니 대고 있을때..어리구나 싶더라구요 ㅋㅋ

  • cc 2013.11.14 15:10 신고

    영화 생각보다 재미있었어요..^^ 이병헌 대박이었고요.. 비행기 유머는 정말 빵 터졌어요..^^

 

생각해보면 숨바꼭질은 참 기괴한 놀이다. 숨어서 떨고 있는 사람을 잡아낸다니. 강도의 시점으로 바라본 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아무렇지 않게 불러댔던 노랫가락도 어딘가 처량맞다. 미묘하게 뒤틀린 단조의 섬뜩한 멜로디.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꼭꼭 숨어라." 놀이의 새로운 발상이 공포가 되는 것처럼 영화 숨바꼭질은 일상의 평온을 뒤틀린 각도로 관객의 내면에 꼭꼭 숨어있는 약점을 발각해낸다. 그것은 바로 불안이다. 내 것을 뺏기는 것에 대한 불안. 온전한 내 것을 가지지 못한 것의 불안.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그래서 영화 숨바꼭질은 무서울 수밖에 없다. 아니 두려울 수밖에 없다는 말이 더 맞겠다.

 

 

 

"언제부턴가 우리 동네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남이 살고있는 집에 몰래 들어와서는, 몸을 숨긴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사람들. 소재는 분명 다르지만 뉘앙스는 어쩐지 기옘 모랄레스 감독의 '줄리아의 눈'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다. 강박증을 앓고 있는 성수(손현주 분)는 어느 날 피폐한 몸차림으로 기이한 소리를 내뱉는 가게 앞 걸인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사람 좋고 다정하게만 보였던 성수의 내면 속 어둠을 송곳처럼 찔러 끄집어낸다. 걸인의 지저분한 행색과 쏟아져나온 구정물. 그의 지저분한 입 주변이 성수를 미치게 하는 것이다.

 

더러움의 추억은 성수에게 그의 잊혀진 유년시절의 형을 떠올리게 했다. 형의 존재는 성수가 청결을 사수하는 이유였다. 걸인의 더러움은 암시처럼 성수에게 형이 실종되었다는 비보를 남기며 다가선다. 철거 직전의 남루한 아파트. 마치 형을 닮은 그 더러운 아파트는 마치 죽음을 예감한 듯 삶을 체념한 주민들에 의해 도무지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형의 흔적을 파헤치던 성수는 점차 이상한 직감에 다가서게 된다. 형을 두려워하는 주민. 그의 옆집에서 죽음을 맞은 아가씨. 형의 서랍 구석구석에서 발견한 생리대와 브래지어. 이 아파트에서 형은 공포였고 혐오였다. 성수가 그토록 진저리를 치던 그 이미지 그대로.

 

 

 

숨바꼭질은 개봉 전 모니터 시사회에서 역대 최고라는 높은 만족도를 기록했다. 그 만족도는 설국열차와 더 테러 라이브의 배턴을 물려받아 한국 영화의 흥행 노선을 뒤따르고 있지만, 특이하게도 평론가의 평점은 그리 높지 않았다. 거의 바닥을 기는 수준이랄까. 관객은 찬성하고 평론가는 반대한 영화. 이 미스터리는 숨바꼭질을 끝까지 보는 순간 다 풀린다. 감상 직전의 쾌감은 상당하지만, 관람 이후의 여운은 그리 크게 남지 않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몇 장면은 돌이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는데 (가령 112가 없는 세계에서 살고있는 것 같았던 손현주라든지 전미선이라든지 아이들이라든지) 이 영화의 전체적인 완성도를 허술하게 보이게 하는 틈이다.

 

 

 

발상 자체는 참신하지만 다 알아챌 만한 곳에 산재한 공포의 나열들이 다소 아쉽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숨바꼭질이 제시한 두 가지 공포의 노선은 보는 순간만큼은 꽤 농밀한 두려움을 안겨준다. 강박이라는 소재를 영화의 초기 이미지로 끌어내 속이 울렁거릴 만큼 불편한 기분이 들게 하는데 이것은 관객에게 상상을 할 수 있는 범위만큼의 두려움을 안겨준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기 직전까지 관객을 불안에 떨게 하는 씨앗이 된다. 그 외의 말하자면 물리적인 공포라고 할 수 있을 갖가지 불편하고 음습한 소리와 가혹하기 짝이 없는 선혈 낭자한 씬들은 보다 직접적인 공포로 관객의 마음을 섬뜩하게 한다.

 

 

한 가지 더, 숨바꼭질이라는 영화가 두려운 이유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인생의 가장 큰 축복이자 히스테리라고 할 수 있을 내 집 마련의 집착을 공포로 비틀어 바라봤기 때문이다. 초인종 아래 새겨진 암호와 같이 이번에는 내 차례가 되지 않을까에 대한 두려움. 가진 자는 내주기 싫어 두렵고 못 가진 자는 서러워서 또한 두렵다. 살인으로 변해버린 무주택자의 분노. 그것은 유령도 남의 일도 아니다. 언제든 내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의 두려움만큼이나 사람을 섬뜩하게 하는 것이 있을까. 그 세 번째 공포와 직면한 순간 이 영화의 여운은 보다 오래 지속될 것이다. (뺏기기 싫으면)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도 보이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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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뷰 잘 읽고 갑니다~ㅎㅎ 리뷰만 봐도 영화가 정말 무섭네요 ㅜㅜ

  • 순작 2013.08.25 10:16 신고

    손현주가 경찰에 신고하려했는데 핸드폰이 안돼서 빌리려고 했던 걸 봐서는 인물들이 112없는 세상으로 생각한 건 아닌 거 같아요~~~다만,이후엔 신고할 틈도 없이 급박하게 돌아간 듯? ㅎ 보면서 느낀 건 역시 미친 사람은 힘이 세다.ㅜㅜ

  • Eunjoo 2013.08.28 23:55 신고

    이 영화 보고 싶어서 닥터콜님 리뷰도 안보고 ㅎㅎ 드뎌 오늘 봤어요 말씀대로 초반 절반은 스트레스 받을만큼 긴장하며 봤어요 허무맹랑한 공포보다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범주의 공포가 더 무섭잖아요ㅠㅠ 다만 후반 범인이 밝혀지는 순간부터 긴장이 풀어지는 게 좀 아쉬웠어요

    • 초반엔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시켜 공포를 성장하게 하는데 후반부의 공포가 상상과 맞닿아있지 않아서 좀 시시한 느낌은 있었어요. 영화 초반에는 굉장히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지향하다가 후반부에 다소 유치할만큼 망가지는게 재밌더라구요. 능력밖이었다기보다는 스스로 망가짐을 선택한 느낌이었달까 ㅋㅋ

 

끝까지 봐도 속내를 알 수 없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포스터만 봐도 대략의 감성이 짐작되는 영화가 있지요. 영화 감기는 단연코 후자 쪽의 작품입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이 영화의 제목, 출연 배우, 포스터, 그 포스터에 박힌 카피를 보고 어떤 영화가 될는지를 미루어 짐작을 했었죠. 그 결과는 기대치를 깎아내리는 악평과 조롱, 조소가 대부분이었고요. 미리미리 영화를 보고 나온 이들 가운데 이 영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시선은 없다시피 했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분은 대한민국 3대 재난 영화 긴급 조치 19호의 재림이라는 극악의 평을 남기기도 하셨더군요. 저 또한 배우 여섯 명의 절박한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꽉꽉 채운 포스터를 보면서, 외면하거나 머리를 비운 고블린의 감상 태도를 갖추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오해했었어요.

 

컨테이너에 가둔 불법체류자를 홍콩에서 한국으로 이동시키는 동안 한 보균자가 퍼뜨린 조류 인플루엔자는 큐브 안을 죽음의 공간으로 물들입니다. 상자 안의 심각성을 알 리 없는 심부름꾼 이희준은 거친 어조로 동생 이상엽에게 농지거리를 하다가 열어젖힌 컨테이너 안의 시쳇더미를 발견하고 기겁을 하게 됩니다. 물론 이런 그도 그 이상의 아비규환이 펼쳐질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이 한 무더기의 시체가 퍼뜨린 바이러스는 삽시간에 도시 하나를 삼켜버립니다.

 

 

 

컨테이너- 하니까 말이죠. 이 영화는 최근 막을 내린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월드워Z와 닮아있는 구석이 많습니다. 재난의 재료가 다름 아닌 인간이라는 점. 전이의 두려움. 인간이 같은 인간을 두려워하며 옮겨져 내 차례가 될까 공포를 느끼며 좀비 영화 특유의 심리가 일맥상통하니까요. 인간을 가장 두렵게 하는 것은 쓰나미나 화산 폭발이 아닌 밀집된 인간의 함락된 이성일지도 모릅니다. 그 밖의 암시처럼 놓여진 몇 가지 도구들이나 시각적인 충격 요소들 또한 월드워Z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 꽤 있습니다. 충실하게 피피엘을 수행하는 마트 털이씬을 바라보며 잠깐 월드워Z의 예루살렘 쇼크가 스쳐 지나가기도 하더군요.

 

"대자연은 연쇄살인마와 같다. 잡히고 싶은 욕구가 있기에 반드시 힌트를 남긴다." 아쉬운 것은 재난을 맞닥뜨리는 공포의 스케일은 웅장해도 해결 방식은 시시하리만큼 단조롭다는 건데요. 스케일 큰 재난 영화를 명작과 졸작의 갈림길로 나누는 것은 영리하고 행동력 강한 주인공이 키워드를 잡기 위해 몸과 머리를 쓰는 과정을 그려내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감기는 키워드를 잡기 위한 행동은 있어도 지능은 거의 이용되지 않아요. 그저 오지랖과 정의감의 경계를 왔다 갔다하는 발랄한 남주인공과 마음과 마음을 재난의 해결책으로 내세우는데 그게 좀 창피합니다. 뭐가 창피하냐면 그 장면에 감독이 원하는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 창피하단 말이죠.

 

 

원하는 욕구를 모두 채우진 못했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를 졸작이라 부를 수 없었던 것은 의외의 디테일과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색다른 스케일 때문인데요. 이 영화는 기존 한국 재난 영화 특유의 프레임을 상당히 벗어난 느낌을 줍니다. 마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같아요 규모가 아니라 재난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렇습니다. 특히 대한민국 전 지역이 아니라 분당이라는 도시 하나만으로도 재난의 스케일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그래요.

 

우리나라의 캐릭터가 컨테이너 속의 불법 체류자를 짓밟는 폭력적 갑의 위치로 묘사된다는 점 또한 흥미로운 부분이었고요. 이희준은 억지로 서울말을 안 써도 되니 연기력이 몇십 배는 껑충- 주다해와는 다른 느낌으로 정말 정말 성격이 나쁜 여의사의 연기를 발성까지 달리하며 재미있게 연기해준 수애도 볼만합니다. 특별출연하신 그분은 마치 사극 속 조선의 임금 같아 재미있더군요. 분당으로 향하는 풀밭을 외국인 노동자가 콜록대며 퍼뜨리는 바이러스 위로 "청정 지역 분당"이라는 플랭카드와 전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서울시 슬로건의 온화함은 아이러니를 안겨주며 감정을 극대화합니다. 직접적인 연출 사이로 의외의 생각지 못한 디테일들이 영화 중간중간에 안식처럼 꽂혀있어요.

 

 

 

분명 영화 감기를 인생 최고의 영화였다고 선언하는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하지만 이 난폭한 여름을 두 시간의 바캉스로 취하기엔 그리 허물이 없을 영화입니다.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를 재난으로 만든 8월의 서스펜스라니. 스릴있지 않습니까? 꼬인 데 없는 구성과 신경을 거슬리게 하지만 밉살스럽지 않은 캐릭터들 꽤 전위적인 느낌을 주는 충격적 비주얼까지. 이만하면 괜찮지 않은가요. 지적 허영심을 채울순 없다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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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리뷰는 영화 설국열차의 내용을 어림잡아 짐작할 수 있는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대한 암시적이고 함축된 표현으로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 방법을 모색했습니다만 그럼에도 어떤 분들에겐 폐가 될 수 있는 대목이 함유되어 있습니다. 특히 결말을 어림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묘사되어 있으니 아직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이라면 아무쪼록 이 리뷰를 피해 가시기 바랍니다.

 

 

 

설국열차는 무척이나 파먹을 것이 많은 영화입니다. 영화는 해결되지 않은 의문을 추진력으로 달리며 수수께끼와 암시 비극적 딜레마를 곳곳에 흩뿌리며 관객의 흥미를 유발합니다. 어떤 관객에겐 피로감과 밋밋함을 전해주지만 누군가에겐 비워둔 퍼즐처럼 괴로운 놀이가 되는. 한 번에 터지는 감상은 덜하지만 오히려 관람 이후의 사고가 머릿속을 지배해 깊은 여운을 남기는, 무거운 잔감의 영화라고 할까요. 만약 이 영화를 후자의 감상으로 지켜본 분이라면 소위 호불호로 갈리는 지금의 엔딩신에 불만을 갖진 못하리라 생각합니다.

 

 

기차는 종착점을 갈망하는 대상으로 인해 존재의 의미를 갖습니다. 설국열차의 딜레마는 열차의 기본적인 성질과 원형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탑승이 목적지가 되는 설국열차는 그 자신이 종착점이오. 집이며 인류의 세계입니다. 열차의 문은 계급과 계급을 규정하는 통제 수단일 뿐 그것은 출구도 아니고 목적지도 아닙니다. 설국열차가 흥미로운 것은 기차라는 이동 수단에 마지막 남은 인류의 세계를 압축해놓았을 뿐만 아니라 그 속에 '인류의 기원'을 담아두었다는 점입니다.

 

 

 

티스를 중심으로 꼬리칸 사람들의 혁명을 묘사한 이 영화의 액션은 얼핏 보기엔 계급과 계급을 타파하기 위한 싸움으로 느껴지지만 하나의 문을 열어젖힐 때마다 인류의 진화와 그에 맞추어 커져가는 포식성은 계급의 혁명이라는 이데아와 어울리지 않는 상실감을 전해줍니다. 빛이 차단된 동굴 속에서 수렵과 채집으로 살아가다가 어둠을 투시하여 빛을 마주한 순간 농경지대로 넘어가며 나무와 돌 그리고 불을 발견하는 과정에 이르러서는 순간 몸서리치는 전율이 온몸을 짜릿하게 강타했다 사라집니다. 섬뜩한 것은 문을 열어젖히는 과정을 진화의 과정이라 해석했을 때 오히려 상위 칸에 가까워질수록 인류는 쇠퇴하며 타락해간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봉준호 감독이라는 자긍심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을 텐데요. 굳이 봉준호라는 이름에 연연하지 않아도 충분히 좋은 작품입니다만 한편 한국 감독이구나 그리고 봉준호 감독의 작품이 맞구나 싶은 몇 개의 반가움은 있습니다. 새해를 맞으며 "한 살 더 먹었네." 라는 개념을 지껄이는 것은 한국인 감독의 사고에서 나왔기에 가능한 유머겠죠.

 

 

 

언젠가 할리우드에서 괴물이 소개되었을 때 어떤 외국인들은 고아성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분명 똑똑한 사고를 했는데 왜 죽어야만 하느냐고요. 그런 의미에서 굳이 선택된 고아성의 존재감이 반갑기 그지없었습니다. 지극히 한국인의 정서라 받아들이지 못했던 서양인의 의문을 요나의 결말로 풀어버린 셈입니다. 그것은 변치 않는 의지였고 성장이기도 했습니다. 설국열차는 분명, 기존 봉준호 감독의 영화와 달리 영화의 완성을 관객 자신이 찾아야 하는 아쉬움이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그 불충분한 균열마저도 그가 쉴 새 없이 부딪혔다 남긴 성장의 생채기라고 생각하면 어쩐지 실망보다는 기대감이 더 생기더군요.

 

 

 

끊임없이 리더의 소임을 갈등하는 커티스가 영웅의 지도자이자 인류의 수호자인 '캡틴 아메리카'의 크리스 에반스라는 사실 또한 흥미로운 캐스팅이었지만 이런 배경의 블록버스터에서 한국 배우가 약에 취해 흐물대면서도 비범한 천재성을 보여주는 괴짜로 등장한다는 부분은 짜릿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캡틴 아메리카에 뒤지지 않는 송강호의 풍채에는 새삼 감탄했네요.

 

 

 

 

인류의 기원을 싣고 달리는 설국 열차. 커티스는 혁명을 주둔했지만, 이 영화가 전하는 혁명의 완성은 변화와 변칙이 아닙니다. 그것은 파괴죠. 최후의 인간이 발을 내디뎠을 때 그 모든 진화의 과정이 한 바퀴 돌아 처음을 바라보는 인류의 평행이론 말입니다. 최후의 포식자가 인류에 의해 멸종 위기를 바라본 종이라는 점도. 이제는 인류 자신이 멸종 위기종이 되었다는 것도. 덧. 영화 관람후 포스터 카피를 꼭 한번 다시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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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유년 시절. 친구는 영화 스피드를 전파하며 이런 소개문을 덧붙였다. "진짜 재밌는 건 이 모든 게 하루 만에 벌어지는 일이라는 거야." 막상 영화를 보니 친구의 말 그대로 반드시 하루 안의 사건은 아니었지만, 광활한 사건을 한정된 공간에서 고립된 상태로 풀어나가는 이 영화의 전개 방식은 어렸던 내 손에 땀을 쥐게 하기 충분했었다. 영화 더 테러 라이브는 스피드가 그랬던 것처럼 테러범과 주인공의 온에어된 격전을 중계하는 영화다. 그리고 스피드가 그랬고 그 외의 영화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런 부류의 영화가 취할 수 있는 상상력을 고스란히 발휘해낸다.

 

 

 

시대를 풍미했던 국민 앵커 윤영화(하정우 분)는 좌천되다시피 맡게 된 라디오 중계석에서 한 남자와 지극히 신경질적인 통화를 나눈다. 라디오가 원하지 않는 대답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이 남자를 그는 그저 시시한 불청객이라 생각하며 쫓아내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전화는 끊기지 않고 급기야 방송 사고로까지 이어진다. "지금 한강 다리를 폭파하겠습니다." 남자의 존재가 같잖았던 윤영화는 충격적인 선전포고마저 소인배의 헛소리라 웃어넘기며 급기야 욕설을 퍼붓기까지 한다. 나를 그렇게 우습게, 만만하게 봐선 안 된다는 남자의 충고가 심상치 않게 느껴질 무렵 순간 파괴의 파동이 윤영화의 귀를 먹먹하게 한다. 남자가 예고한 그대로 한강 다리는 파괴되어 버렸던 것이다.

 

 

 

움직일 수 없는 윤영화는 앵커 자리에 고정된 채로 목을 죄는 폭발의 위협을 감당하며 테러범을 협상하는 '멋진 하루'를 보낸다. 신경질적인 테러범의 지시사항 때문에 이 영화의 주인공 윤영화는 등장한 지 몇 분도 되지 않아 발이 묶이는 최악의 핸디캡을 갖게 되고야 만다. 그것은 동시에 영화의 핸디캡으로 이어졌다. 사뭇 경이로운 것은 이 영화의 시간을 다루는 태도다. 자리를 벗어날 수 없는 주인공은 영화의 9할 이상을 방송국이라는 한정된 장소에서 교전하는데 그것마저도 몇 평 남짓하지 않은 협소한 라디오 스튜디오 안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때운다.

 

 

 

영화의 모든 배경을 고작 스튜디오 하나로 떼워버릴 만큼의 테러적인 자신감의 원천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영화가 끝나고 올라가는 오로지 하나의 특별한 이름, 하정우라는 세 글자로 설명된다. 더 테러 라이브의 홍보물을 돌이켜보자. 포스터 위에 놓인 터져버린 한강 대교와 더 테러 라이브. 그리고 하정우라는 특별한 이름. 제작진이 이 이름에 거는 자신감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증명할 수 있는 결과물이다. 이 포스터만큼이나 영화는 오로지 하정우라는 배우의 연기에 사활을 건듯한 느낌을 전해주는데 그럼에도 이를 악물고 내민 최후의 수단 같은 초조함이 아니라 제작진의 흡족한 여유가 느껴져 하정우라는 배우의 신뢰가 어느 정도인가를 짐작하게 한다.

 

 

 

그간 하정우라는 캐릭터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비린내 나는 속물 엘리트의 역겨운 디테일을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소화해내는 하정우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 같은 하정우라는 배우의 마지노선을 완벽히 무너뜨린다. 특히 심드렁한 라디오 패션을 화면용 수트 차림으로 갈아입을 때 그가 얼마나 자연스러운 흐름을 읽어나가는 배우인가를 여실히 증명해 보인다. 잘 차려입은 엘리트 안경이 무색하게 가글을 하듯 입을 헹구며 음료를 마시는 모습에 역겨움을 느끼다가도 전 아내의 행적에 가슴 설레이는 팬서비스 같은 장면도 소환되어있다. 영화 속에서 한번 마주치지도 않은 여자에게 몇십 년 치의 애착이 느껴지게 할만큼의 애정을 이 남자 참 잘도 표현해낸다.

 

 

 

영화라는 무한의 가능성 속에서 소수의 기회만을 포획해 블록버스터 같은 오락 영화를 만들어낸 감독의 기지에 박수를 보낸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그 좁은 공간 위에서 97분의 감정을 느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다. 상투적인 소재에 허무맹랑한 전개가 다수 포함되어있음에도 블랙코미디처럼 희화화된 사회의 단상은 이것을 마냥 있을 수 없는 일로 치부할 수 없게 한다. 무엇보다 명검을 얻은 플레이어의 자신감이 도대체 어느 정도인가를 확인해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다. 나의 하정우를 도저히 나쁜 놈으로 만들 수 없었어...스러운 마무리가 다소 아쉽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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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포털사이트에서 영화 울버린의 홍보 문구를 이렇게 달아놓았더군요. "휴 잭맨의 한국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는 울버린을 봐야만 한다" 휴 잭맨의 한국 사랑을 마케팅으로 매도하려는 것은 아닙니다만 울버린의 홍보팀이 그 마음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던 것은 사실이죠. 아이러니한 것은 휴 잭맨의 한국 사랑을 홍보 방향으로 내세운 영화가 근래에 보기 드문 왜색의 향연을 펼쳐내고 있다는 점이지요. 영화 울버린은 모든 오감을 일본에 바친 영화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후지 티비에서 만든 팬서비스용 전대물이라고 소개받았어도 그러려니 했을 겁니다.

 

누군가는 퍼시픽 림을 왜색 영화라 말하지만 단언컨대 퍼시픽 림은 일본의 정서를 녹여낸 영화가 아닙니다. 로봇을 동경하던 메카 오덕후의 양덕 파워를 증명한 작품일 뿐이죠. 일본인 여주인공이 등장한다고 해서 그 작품을 왜색이라 총칭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영화 울버린은 두 명의 일본인 여주인공을 두고 중심인물의 대부분을 일본인으로 구성한 것도 모자라 일본을 울버린의 소우주로 설정합니다.

 

 

 

샤부샤부와 유카타 파칭코와 사무라이 할복과 러브호텔.. 네. 과연 울버린 풍 일본 관광 패키지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장면들이지요. 일본의 도심지와 시골을 오가며 그들의 언어와 습관과 전설을 취득하는 울버린을 보고 있노라면 도대체 그가 스토리를 만들고자 하는 것인지 블록버스터급의 일본 홍보물을 제작하고 있는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지경이지요.

 

일본의 길라잡이 같은 울버린에 저항감을 느끼는 한국 관객의 심리는 당연합니다. 더군다나 휴 잭맨의 한국 사랑을 잔뜩 주입 받고 극장을 찾은 순진한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강제로 일본 관광을 시키는 불쾌한 경험으로 남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제게 있어 울버린을 참을 수 없었던 진짜 이유는 왜색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겨움이죠. 이 작품의 장르를 액션 영화가 아닌 로드 무비라고 소개받았어도 지루함에 학을 뗐을 겁니다. 만약 영화 울버린의 제작진이 일본 여행을 안내하는 히치 하이커를 자청한다면 그는 해고당했어야 마땅합니다.

 

 

 

애초에 일본과 인연이 많은 울버린입니다. 왜색을 지독히도 혐오한다면 이 캐릭터를 선택해선 안 되겠죠. 만화 원작에서 손꼽는 그의 에피소드는 대부분이 일본을 배경으로 두고 있으니까요. 심지어 일본인 아내를 두고 있는 울버린이기에.. 사실 왜색 논란은 작품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라 이 영화의 단점으로 들고 나설 순 없을 겁니다. 문제는 이 영화의 왜색이 원작을 경배하는 존경심이건 일본정보 관광국에서 지시한 재팬 투어 홍보물이건 간에 지독히도 재미가 없다는 점이죠.

 

영생의 삶이 저주가 되어버린 사나이, 울버린을 내세우면서도 막상 그의 고뇌는 작품 속에서 그리 깊이 깊게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차라리 유머를 덧붙였을지언정 슈트를 버린 토니 스타크의 각성이 훨씬 깊이가 느껴졌을 정도니까요. 미소조차 배제할 만큼 묵직한 색채로, 이 영화는 시종일관 무겁게 고뇌합니다만 구미가 당기지 않는 러브라인, 상투적인 캐릭터를 단순한 스토리에 묶어두고 그것조차도 허술한 개연성에 깊이는커녕 피로감만 더해줍니다. 21세기에 공주님을 경호하다 눈이 맞는 보디가드 이야기가 구미가 당기겠습니까? 적어도 저는 아닙니다.

 

 

심지어 이 영화는 일본을 제대로 홍보하는 것조차 실패했습니다. 이 영화 속 일본인은 미개하며 음산하고 부정적이죠. 그나마 선인으로 그려지는 인물은 탈 일본화된 일본인 여주인공뿐입니다. 서양인의 선입견을 조금도 걸러내지 않은 불편한 오리엔탈리즘의 극치를 관람하는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이 영화는 왜색을 불쾌해하면서도 한편 서양인의 오만함을 경멸하게 됩니다. 문제는 이 영화의 취지가 관객의 불편한 철학을 동요하기 위한 문제적 스토리 또한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건 히어로 액션물이잖아요.

 

그나마 보는 즐거움이라도 경이로웠다면 좋았을 텐데요. 로봇과 메시아 슈트가 싸우는 기존의 히어로물에 비해 아무리 파워풀해도 잘 쳐줘야 동물-이라는 느낌을 주는 울버린을 가뜩이나 힘까지 제압해놔서 야쿠자 몇 명에게 빌빌대는 모습으로 실망감을 안겨줍니다. 흥미로운 액션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불쾌함과 지루함을 이겨낼 만큼의 힘은 없네요.

 

 

왜색, 오리엔탈리즘, 부족한 서사, 실망스러운 볼거리. 그럼에도 울버린을 관람할 유일한 이유를 찾는다면 오로지 맨 중의 맨 휴잭맨의 선의 뿐입니다. 그러니까 이젠 됐겠죠. 더이상은 휴 잭맨의 중년과 재능이 이런 작품에서 소모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더 좋은 작품을 위해서라면 한국을 조금 덜 사랑해도 좋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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