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콜의 미소년 미소녀 탐구생활

인터넷은커녕 PC통신조차 대중화되지 않았던 90년대 초반. 미확인 비행물체처럼 등장한 서태지와 아이들은 다가가지 못하는 저쪽 세상을 연결하는 인간 포털이었다. 서태지는, 마니아들 사이에서나 알음알음 전해지던 저 세계의 최신 음악을 특유의 깔끔한 손길로 현지화 했다.

 

 

 

 

 

무엇보다 신선했던 것은 음악 그 이상인 서태지와 아이들의 이데아를 총괄하는 전략이었다. 투명한 안경 뒤에 반짝이는 영민한 눈빛만큼이나 서태지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고 그가 닿은 손길은 고착화된 패러다임을 무너뜨리는 혁신을 선사했다. 상표를 떼지 않은 의상 같은 소소한 것들에서부터 앨범과 다음 앨범 사이에 틈을 두어 ‘잠적 기간’을 갖는 가수들의 연례행사 또한 그가 대중화한 것이다.

 

 

 

서태지의 해피투게더 출연이 감정의 호불호를 떠나 애석했던 것은 ‘스타는 유행을 쫓는 사람이 아니라 유행을 선도해나가는 사람’이라는 말과 가장 잘 어울렸던 서태지가 낡은 상술을 고집하고 있어서다. 21세기의 대중을 상대로 90년대 마케팅을 고수하고 있다. 이건 서태지 답지 않다.

 

서태지의 신보 Quiet NIght를 발표하기에 앞서 그는 어느 때보다 공격적인 마케팅을 시도했다. 쏟아져 나오는 기사들 또한 매스미디어의 폭력을 한탄했던 서태지 답지 않게 꽤나 우호적이었다. 하지만 그 기사 헤드라인 하나하나가 어딘가 이상했다. 프로그램을 뜯어 고쳐 유재석과의 1:1 토크쇼로 딜을 건 해피투게더를 선택한 서태지가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는 ‘특혜를 받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출연에 응했다고 한다.

 

 

 

이것이 서태지 자신이 원한 홍보 방향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서태지는 특혜를 받는 것이 마땅한 스타’라는 기본 전제를 깔아두었다는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다. 이에 시청자는 거부감을 느끼고 일관성 없는 특혜 요구에 불만을 품게 된다. 서태지는 음악인이다. 단독 출연의 특혜 요구는 해피투게더가 아닌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요구하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정작 음악 프로그램 유희열의 스케치북은 단독 출연의 편애를 거부한 서태지가 토크쇼 해피투게더는 프로그램의 방향성까지 뜯어고치며 게스트로 나가겠다고 하니 관용을 내세운 스케치북의 전략이 보여 주기용 쇼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 것이다.

 

10월 9일. 서태지의 해피투게더가 본격 방영되었지만 출연 전 쏟아졌던 논란만큼의 실 시청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놓치진 않았지만 지난주 방송분에 비해 4포인트가 하락한 수치다. 인천 아시안게임으로 인한 편성 변동 특혜를 무시할 순 없겠지만 프로그램의 성격마저 무너뜨리며 편애한 대가치고는 그 결과가 그리 탐탁지 않다.

 

 

 

이날 해피투게더는 시작부터 남달랐다. 언제나 손님의 맛을 평가했던 유재석이 손수 음식을 만들어 단 한 사람의 손님을 모셨다. 유재석이 요리한 ‘잘자어’는 성시경이 해피투게더의 야간매점에 출연해서 선보인 것으로 서태지가 직접 해투 제작진에 주문했다고 한다.

 

서태지가 꼭 먹어보고 싶었던 요리라는 첨언으로 그가 해피투게더의 시청자임을 암시하는 대목이 나왔지만 실상 서태지에게 ‘해피투게더’는 아랑곳없는 프로그램으로 보였다. 예상했던 바대로 서태지가 해피투게더에 출연했던 것은 그곳이 유재석과 대화를 할 수 있는 공간이라서였다. 왜 해피투게더를 선택했느냐는 국민MC의 질문에 그는 유재석을 좋아해서라고 대답했다.

 

 

 

몇 명의 연예계 동료들과 어울려 친근하게 사우나복을 입고 진탕 수다를 떨다 어설픈 야식을 노나 먹는 해피 투게더의 포맷 따윈 서태지에게 중요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런 서태지를 위해 유재석과 제작진은 오늘 하루 해피투게더를 완전히 버려버렸다.

 

물론 21세기에 발 맞추려는 서태지의 노력을 깡그리 무시하자는 것은 아니다. 연예인들의 연예인인 서태지다. 살아생전에 그의 아기 사진을 볼 수 있으리라 상상조차 할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서태지의 파격은 어디까지나 그를 둘러싼 패러다임 내의 소소한 발걸음에 불과했다.

 

 

야간매점의 손님이 될 순 있어도 손수 요리해 평가 받는 포맷을 지킬 순 없었다. 해피투게더의 유니폼인 찜질방 옷 따위를 입는 서태지는 없었다. 서태지 특유의 야구모자와 트레이닝 복 차림의 편한 복장이 그가 해투에 베풀 수 있는 최대한의 관용이자 깨뜨릴 수 있는 특혜였다. 이쯤 되니 서태지가 미운 것이 아니라 차라리 안쓰러웠다.

 

 

 

지금은 찜질방 옷차림의 성룡이  매운 김밥을 만들어 대접하고 1등이 고파 입에 밀어 넣는 그를 “김포 공항에 형 전용비행기 있어.”라고 말리는 시대다. 그렇게 깨뜨릴 수 없었다면 그렇게 특혜를 받고 싶었다면 해피투게더가 아닌 다른 프로그램을 선택했어야만 했다.

 

 

방송이 끝난 뒤 유재석은 최소 4-5년 이상 나이 들어 보였다. 그는 서태지가 최고였던 시절에 방송이 고파 뭐든지 할 수 있는 패기만만한 신인 리포터였다. 이젠 서태지도 엄두 못 낼 ‘국민’ 명찰의 유재석이 우스꽝스러운 가발에 앞치마를 두르고 손수 요리를 만들어 대접한다. 이 까다로운 동갑내기 동료를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은 유재석이 빛나 보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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