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콜의 미소년 미소녀 탐구생활

KBS 아나운서 손범수가 돌격대장으로 열연했던 ‘열전 달리는 일요일’이라는 프로그램을 기억하시는지. 거대 체력 훈련장 같은 세트 속에서 대학생의 체력, 정신력, 지력 등을 테스트 했던 일요일 아침의 에피타이저. 부여된 시련을 이겨내는 자만이 다음 관문으로 넘어갈 기회가 쥐어졌기에 훼방꾼인 귀신과 도깨비를 물리치는 청춘 남녀들이 어린 내 눈엔 꽤 심각해 보였더랬다.

 

 

 

 

 

모든 시련을 이겨낸 최후의 일인은 탈출 직전의 공중 다리 건너가기를 하게 되는데 마지막 관문이니 만큼 난이도는 상상 이상이었고 안전장치를 마련해 두었다지만 양 사이드에서 다리를 흔들거나 고무공을 던지는 도깨비를 물리치고 위태로이 고공 다리를 건너야 했던 도전자의 모습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릴이 있었다.

 

너무 해묵은 이야기라 내 추억이 아니라면 보다 가까운 기억의 ‘보야르 원정대’라는 프로그램은 또 어떠하신지. 프랑스 서부 해안에 심어둔 해상 요새 포트 보야르에서 19명의 스타가 펼치는 험난한 미로 탈출기 보야르 원정대는 거미 소굴에서 열쇠 찾기, 속이 보이지 않는 복불복 단지에 손 집어넣기, 바퀴벌레와 두꺼비가 우글대는 방에서 힌트 찾기 등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관문을 통과하여 미로를 빠져나가는 서바이벌 쇼였다.

 

 

 

얼기설기한 기억 속에 유달리 또렷하게 남아있는 향수는 역시나 미로의 최종 관문이다. 테스트 자체보다 그것을 통과했을 때, 최후의 고지에서 얻어낼 수 있는 결과물이 무엇인가가 더 궁금했었던 것 같다. 고공 다리를 건너면, 호랑이 소굴에서 금화를 집어내고 나면 어떤 세상이 펼쳐질 것인가. ‘그리고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뒷이야기가 궁금한 동화책처럼 커튼이 닫힌 미로의 건너편은 미지의 세계다.

 

인간은 정말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갖고 있구나! 라고 감탄하게 하는 작품들이 있다. 메이즈 러너 또한 재기발랄한 아이디어가 빛나는 작품이다. 기억이 소각된 채 공터에 떨어진 무수한 소년들. 그들의 행동반경을 제압하는 거대 미로. 폐쇄된 환경에서 만들어낸 소년들만의 작은 생태계.

 

 

 

시작하자마자 숨이 턱턱 막히는 철장 도르래에 갇혀 올라온 주인공이 자신을 내려다보며 농을 던지는 소년들에 놀란 토끼처럼 웅크려 있다가 가공할 만한 스피드로 공터를 뛰어나가는데 나자빠진 주인공을 훑어 지나가며 원을 그리는 카메라가 이 아이를 막고 선 무언의 존재를 보여줄 때 관객은 그와 함께 얼이 빠지게 된다. 마치 출구가 없는 고대 경기장처럼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무한의 벽. 그 압도적인 중압감에 아찔함을 느껴 현기증이 나는. 이게 바로 메이즈러너의 세계다.

 

이런 부류의 15소년 표류기에서 스토리 보다 더 거룩한 미학은 캐릭터의 매력이다. 메이즈 러너 또한 십인십색의 개성을 표출하는 남자들로 승부를 보는 작품이다. 소년과 청년 그 어드메에 서있는 앳된 얼굴에 건장한 육체를 가진 집 없는 아이들이 또 다른 진짜 사나이의 교본을 증언하며 여심을 설레게 한다.

 

 

 

 

역변이 무어냐고 온몸으로 외치는 중인 러브 액츄얼리의 드럼 치는 소년, 토마스 생스터는 그룹의 2인자로 팀의 정신적 지주를 담당하는 지적인 인물, 뉴트를 연기했다. 유별나게 소년 같은 얼굴에 고전 초상화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는데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얀색인 뉴트는 그 자체로 번쩍번쩍 빛나는 발광체 같다. 피터팬을 형상화한 얼굴을 갖고 있어 사전 정보 없이 이 영화를 찾았다면 이 글레이드에 갇힌 아이들은 그가 물어다놓은 네버랜드의 주민들이 아닌가 싶다.

 

우리의 주인공, 토마스 역의 딜런 오브라이언은 역시 만천하의 주인공답게 정의 앞에 고집불통인지라 속 터지게 하는 순간들이 있지만, 역시 이런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오지랖을 좀 떨어줘야 스토리가 진행이 된다. 더군다나 폐쇄된 공간에서 흔히 벌어질 법한, 성인군자조차 미쳐가는 배틀로얄 류의 서바이벌 전쟁 없이 워낙 순진하고 순수한 아이들이 모여든 글레이드라 주인공의 캐릭터가 딱히 모났다는 생각 또한 들지 않는다.

 

 

 

 

공터의 일인자 알비(에멜 아민 분)은 신참으로 영입된 토마스에게 이 마을에 유입되려면 몇 가지 법칙을 지켜야 한다고 일러주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친구들을 공격하지 말 것이다. 그 가르침을 뼛속 깊이 새겨들었기 때문인지 몰라도 친구를 구하겠다는 일념 하나에 압사의 공포를 무시하고 몸을 던지는 토마스의 선택은 분명 오지랖에 고집불통이랄 수 있지만 덕분에 이 영화 속에서 가장 스릴 넘치는 감동을 선사해준다.

 

극한의 상황에서도 인간성을 상실하지 않은 소년들과 그저 스피드와 체력이 남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타인을 대신해 그것도 매일 아침을 아비규환의 미로 탐험을 하는 메이즈 러너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 영화의 지향점이 생존 게임에서 요구하는 이기심이 아닌 희생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행동반경을 제압하는 미로와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간악한 짐승의 울부짖음에도 인간성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 무려 3년간 다져왔던 소년들의 규칙이 눈물겹다. 그래서 규칙을 사수하려는 갤리(윌 폴터 분) 또한 악역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시스템이 만들어낸 희생양일 뿐.

 

 

 

팀의 정신적 리더와 육체적 리더 모두 흑인과 유색인종이 사수했다는 사실 또한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관용이 녹아들어 있는 글레이드의 정신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장치랄까. 특히 메이즈 러너의 리더로 등장하는 한국인 캐릭터 민호(이기홍 분)은 역대 할리우드에서 맡았던 국내 배우의 역할을 통틀어 가장 매력적인 인물을 연기해 시선을 사로잡는다.

 

 

 

미로를 탐험하는 메이즈 러너는 글레이드 내에서 가장 빠른 다리와 강한 체력을 가진 인물로 구성된다. 그러니 메이즈 러너를 이끄는 리더 민호는 그야말로 에이스 중의 에이스인 것이다. 그런 만큼 구성인물 중에서 가장 독보적인 매력을 자랑하는데 무엇보다 멋진 것은 딱히 한국인이라는 부연 설명 없이 그 자체로 ‘어썸한 민호’라는 이미지의 해방이었다. 문이 열리기 직전 미로 앞에 서서 비장한 표정으로 전의를 다진 뒤 치타처럼 달려 나가는 그 모습에 가슴이 요동치지 않은 사람이라면 당신은 여자가 아니다.

 

 

 

영화 미스트와는 정 반대의 행동 강령을 요구하지만 꿈과 희망이 있는 결말을 찾아내기엔 너무나 아득하고 고단한 미로. 판타지 세계가 제시하는 두 가지 인생의 지침서가 우리를 상념하게 한다. 안온하게 사육당할 것인가, 위험한 자유 속으로 방임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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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1

  • 이 영화를 텍스트로 삼기에는 진짜사나이가 안고 가야 하는 짐이 너무 무거운 것 같습니다.
    리얼이라는 허상과 홍보라는 압박을 먼저 내려놔야 하는데....둘 다 힘들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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