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콜의 미소년 미소녀 탐구생활

는 남자, 남자 장동건이 아저씨 원빈을 뛰어넘을 수 없었던 까닭

우는 남자장르액션, 드라마2014.06.04 개봉런닝타임 116분출연 장동건, 김민희, 브라이언 티, 김희원, 김준성

 

남을 죽이는 일을 업으로 삼는 냉혈한이 한 사람에게만 인간의 감정을 품는다는 것은 어떤 서사를 덧붙여도 그리 수긍 가는 행동이 아닙니다. 도리어 사연을 풀면 풀수록 구차해지고 개연성의 허점만 집착하게 할 뿐이죠. 그러니 차라리 이런 이야기는 논리가 아닌 감정으로 설득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일순간의 감정 때문에 자신이 의도치 않은 일탈을 하게 될 때가 있으니까요.

 

 

 

타인의 생사에 큰 동요가 없는, 뿌리 내린 식물 같은 남자 레옹이 살인 청부업자에서 소녀의 보디가드가 되어버린 이유. 그건 오로지 조그만 틈으로 들여다본 가냘픈 소녀의 가녀린 구조 요청 한마디였습니다. “살려주세요. 제발. 이 문을 열어주세요.” 마틸다와 레옹이 주고받은 일순간의 교감. 이렇게 되면 딴죽을 걸 이유가 없어지죠. 그 순간의 필링이라는데요.

 

 

 

우는 남자는 마치 혼날까 봐 몸을 사리는 어린아이처럼 살인자 곤이 어찌하여 연인도 친구도 지인조차 아닌 모르는 여자 때문에 평생을 몸담아온 조직을 버리게 되었는가를 참 구구절절한 방식으로 설명하려 애를 씁니다. 비극은 사연을 부여하면 부여할수록 장동건의 심리가 피곤하게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채무 관계에 얽힌 살인. 딱히 대의명분 없이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킬러 곤(장동건 분)은 인기척이 느껴진단 사실 하나만으로 문을 열어 확인해볼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고 냅다 총알을 꽂습니다. 그리고 그가 문을 열었을 때 가슴에 피를 흘리고 우뚝 선 소녀 하나.

 

 

 

전쟁 영화를 보면서 주인공이 아닌 엑스트라의 죽음에 눈물 흘리는 사람이 드문 것처럼, 곤이 사내를 죽일 때만 하더라도 그는 그저 독립된 빚쟁이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우발적 살인으로 처참하게 죽어가는 소녀를 발견했을 때 그들의 죽음은 개인의 것이 아닌 가족의 비극으로 인식되게 됩니다. 그래서 곤은 피폐해지죠.

 

그럼에도 조직은 일가족 몰살을 명합니다. 고의로 죽인 아버지. 실수로 죽인 소녀. 거기다 남은 어머니까지 제거하라는 거죠. 새삼스러울 것도 없습니다. 이게 늘 곤이 하던 일이니까요. 그럼에도 그는 소녀의 죽음이라는 에피소드. 그리고 애수와 증오가 깃든 특수한 환경 때문에 그가 이제껏 해왔던 일에 진한 피로를 느끼게 됩니다.

 

 

 

교포 곤은 어쩐지 모국에 정나미가 떨어진 채로 수십 년 만에 대한민국의 땅을 밟습니다. 소녀의 어머니, 모경을 죽여야 한다는 임무를 안고서요. 여자를 죽일 기회가 더러 있었음에도 불구 어쩐 일인지 그는 망설입니다. 여자의 존재에 동요한 탓인지 휴대 전화를 무음으로 해두지 않은 초보적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고요.

 

겉만 봐서는 그저 세련된 파티복의 성공한 여자. 프로젝트를 성사하고 냉랭한 어조로 회의를 이끄는 그녀의 모습에서 죽은 아이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곤은 미묘하게 심장을 찌르는 이 여자의 심리를 뒤쫓습니다. 화려한 커리어우먼의 이면에 치매 어머니를 봉양하는 가족의 의무감. 병실을 채우는 마리아의 목소리. 성공한 여자 모경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불안정한 시선으로 속죄하듯 흥얼거린 대니보이.

 

 

 

죽은 아이를 그리워하다 자살을 기도한 그녀는 어쩐 일인지 곤의 어머니를 연상하게 해서 쉽사리 총을 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들여다본 곤의 유년은 엄마에게 버림받는 공포로 얼룩져 있더군요. 그건 배고픔이나 목마름보다 더 사무치는 고통이었죠.

 

곤은 승진 욕과 돈 때문에 미국행의 아이를 쫓아가지 않은 모경(김민희 분)에 어머니를 투영하여 원망과 환멸로 물들여져 있던 지난날을 돌이켜 봅니다. 그토록 모질게 나를 밀어내던 어머니가 돌아선 길목에선 저 여자처럼 자책하며 울먹이진 않았을까. 아이의 유품을 내다 버리라고 히스테리를 부리더니 어느새 비디오에 기록된 딸의 모습을 애타게 갈구하며 울고 있는 걸요. 곤은 성공의 끝에서 여자가 흥얼대던 대니보이가 역시나 인파를 둘러싸고 같은 노래를 부르던 딸을 추억하는 키워드라는 사실에 그만 무너져 내립니다.

 

 

 

곤은 대니보이에 서린 유년의 애수와 그리움을 떨쳐내기 위해 귀를 막은 채 킬러의 손으로 방아쇠를 당겨 보지만 그것은 코를 찌르다 곧 그리워지는 매실주처럼 쉽사리 지워지지가 않는 향기였습니다. 그의 나이만큼 숙성되었을 모국의 매실주를 받아들이면서 어느새 곤은 모경, 아니 그의 어머니를 속죄합니다.

 

이처럼 대략의 줄거리로는 설명되지 않을 길고 긴 사연과 동기부여로 영화는 킬러 곤의 심경 변화를 설득하려 합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우는 남자에 비하면 불친절하다고 할 수 있을 레옹이나 아저씨의 설득력보다도 우는 남자의 그것이 훨씬 떨어진다는 점입니다. 관객은 영화를 보는 내내 도대체 곤이 왜 그토록 모경에게 집착하는지를 사고해야 합니다. 영화가 제시한 장문의 설명들은 도리어 관객이 풀어 헤쳐야 할 고단한 숙제처럼 느껴집니다. 액션 영화의 미덕인 시원시원한 쾌감은 온데간데없고 도리어 묵직한 피로감만 잔상으로 남습니다.

 

 

 

관객이 곤의 심리에 공감할 수 없는 까닭은 곧 이 영화가 불만족스러운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연에 집착하면서 정작 곤과 모경의 교감에는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 쾌감이 느껴지지 않는 무의미한 액션, 그리고 곤과 모경의 관계만큼이나 부조화였던 관객과 장동건의 소통의 부재. 이 모든 문제를 아우르는 원인에는 애석하게도 배우 장동건의 아쉬운 캐릭터 해석력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장동건이 연출한 ‘곤’은 단편적으로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인물인지를 파악하기 어려운 캐릭터입니다. 어사무사하게 신비롭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부여받은 모든 클리셰가 어설프기 때문이죠. 그래서 곤은 무언가 마무리가 덜 된 미완성의 캐릭터 같습니다. 감독은 지나치게 잘생긴 배우 장동건의 뜻밖의 귀여움을 팬서비스하기 위함인지 아침 드라마 해프닝처럼 물을 게워내지 않나 토사물을 잔뜩 묻힌 망가진 얼굴에 세상 다 산 사람처럼 위험한 도박 같은 장난을 치게 지시합니다. 그러나 정작 장동건은 느끼하고 부담스러운 액션을 담백하고 자연스럽게 소화해낼 수 있는 역량이 없죠. 그래서 곤의 장난과 심드렁한 행동거지는 배우 장동건의 실패한 개인기로밖에 느껴지지 않습니다.

 

 

 

 

레옹이 마틸다를, 차태식이 소미를 놓을 수 없는 이유. 일평생 누구도 하지 못한 것을 이 아이들은 해냈기 때문에. 메마른 대지의 소나기나 터널을 뚫은 빛. 아무도 침범하지 못할 일대일의 교감이 선사한 이 선명한 동기부여를 대신한 우는 남자 속 곤의 트라우마는 정작 최모경과 곤의 관계에 놓인 보이지 않는 벽이 되어버렸습니다. 곤이 모경을 지키려 하는 까닭은 우는 여자에게 자신의 친모를 투영했기 때문입니다. 이건 곤과 모경만의 맨투맨이 아니죠. 레옹 클리셰 특유의 소녀와 아저씨의 특별한 교감. 그 일생에 한 번 뿐일 인연의 압도적 폭발력이 별반 와 닿지 않습니다. 적어도 영화에서 그려내는 곤의 모경은 대체할 수 없는 특별한 인연이 아닌 엄마의 대리인이었으니까요.

 

최모경과의 통화에서 곤은 잔뜩 으스대는 비아냥 조의 목소리로 그녀를 조롱합니다. 여자의 아이를 죽인 죄인이라서. 정 대신 살의를 느끼게 하려는 의도였겠지요. 그러나 정작 정이 떨어진 것은 최모경이 아니라 관객이었죠. 숨은 의도를 파악하기도 싫을 만큼 어설프게 비열하고 뻔뻔한 목소리. 저는 97년도 영화 패자부활전을 참 재밌게 봤었는데 장동건의 깐족거림과 나르시시즘. 그리고 비열한 연기는 차라리 이때가 더 나았습니다.

 

 

 

우는 남자에서는 액션이 정말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많이 나오기만 합니다. 그리고 장동건의 액션이 아저씨의 원빈처럼 그리 폼 나지가 않습니다. 위험한 장애물을 뛰어넘을 때, 잔인하게 적을 처리할 때 등. 무서워서 혹은 미안해서 멈칫하고 주저하는 망설임이 느껴집니다. 그건 바로 장동건이 선량하게 살아왔다는 증거가 되겠지만, 에이스 킬러 곤의 정체성과는 부합하지 않는 실책이었죠.

 

굉장히 애를 쓴 작품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우는 남자라는 신파조 제목의 선입견과는 달리 뜻밖의 감상적인 장면의 단상이 마음을 아릿하게 저리기도 했고요. 매실주와 대니 보이 그리고 종이학 등의 키워드 같은 디테일. 마치 아이의 성장비디오를 보는 아빠처럼 연출된 미니 빔의 공간. 천장에 일렁이는 모경의 딸과 곤의 애수 어린 눈빛은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동건의 연기이기도 했습니다. 덧붙여 그것은 이 영화가 구구절절한 설명보다는 함축된 이미지 나열에 더 설득력이 실렸다는 점. 배우 장동건의 역량은 로맨스나 남자 이야기보다는 따뜻함이 서린 인류애 쪽이 더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것이라는 단서를 남겨두기도 합니다.

 

 

 

서른네 살의 원빈은 청춘을 붙잡아 발버둥 치고 싶을 나이에 과감하게 ‘아저씨’가 되어주었습니다. 성인 남녀의 로맨스가 아닌 유사 가족의 특별한 교감으로 원빈에게 기대하는 사랑의 범위는 더욱 포괄적이고 능동적인 것이 되었죠. 그것이 청춘스타 원빈이 무너뜨린 벽입니다. 아저씨가 아닌 우는 남자에서 남자의 이상향이자 여성의 이상형인 미남 배우 장동건의 넘지 못한 벽을 바라봅니다. 우는 남자가 아저씨가 되지 못했던 것. 그것은 비단 장동건이 원빈을 뛰어넘지 못해서만은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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