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콜의 미소년 미소녀 탐구생활

 

개봉하지도 않은 영화의 결말을 유출하고 싶어 하는 감독은 없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를 소재로 한 작품은 필연적인 딜레마를 가진 것이나 다름없죠. 관람석을 채운 저 많은 사람은 하나같이 미리 스포일러를 유출 당한 상태일 테니까요.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영화로 재생산하는 힘은 결말까지 이르는 과정에 담은 21세기의 해석일 테죠.

 

영화 ‘역린’은 1777년의 여름에 일어난 24시간의 정조 암살 사건, ‘정유역변’을 두 시간으로 압축한 역사극입니다. 그리고 ‘다모’와 ‘베토벤 바이러스’와 ‘더킹 투하츠’로 친숙해진 유명 드라마 PD, 이재규 감독의 두 번째 스크린 도전작이기도 합니다. 퓨전 사극 다모를 통해 시청자에게 그 이름을 각인시켰던 만큼 데뷔작이나 다름없는 역사극 역린의 장르가 사무치게 다가옵니다.

 

 

 

영화감독의 브라운관 입성은 어쩐지 고수의 도움을 받는 느낌이지만 드라마 감독의 스크린 데뷔는 도리어 그 경력이 장애가 됩니다. 시작부터 선입견이라는 핸디캡을 깔고 가야 했던 이재규 감독은 마치 그 분풀이인 양 영화 대부분의 구성을 생소함으로 채워 넣었습니다. 마치 이 영화의 주제나 미션이 선입견 파괴라도 되는 듯이요.

 

역린의 주연 현빈은 적지 않은 영화를 찍었지만 아직은 드라마 스타로 더 익숙한 배우입니다. 심지어 사극은 그에게 있어 첫 도전이었죠. 어디 그뿐인가요. 정재영, 조정석, 조재현, 한지민. 개봉 전부터 관심을 끈 이 화려한 캐스팅의 대 주제는 분명 도전과 실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멤버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스크린이 아닌 안방극장에서 더 친숙한 배우이거나 사극에서의 역할을 기대하는 배우는 아니거나 적어도 맡은 역할의 성격이 관객의 기대치를 뛰어넘는 캐스팅이거나. 조정석에게서 오로지 살육자의 쓰임새로 길러진 냉혹한 살수의 역할이나 한지민에게서 치명적인 팜므파탈의 이미지를 기대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요. 이 무모하리만큼 생소한, 선입견으로 둘러싸인 캐스팅은 일견 영화 역린의 주제 의식과도 닮았습니다. 왕의 자격을 인정받지 못했던 아버지. 종국에는 선대왕에게 버림당해 뒤주에 갇혀 죽어야만 했던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를 향한 외경심. 그는 왕의 그릇이 아니라는 선입견.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1776년 3월 10일, 그가 즉위 당일 내뱉은 윤음의 첫머리는 자리의 모두를 얼어붙게 했습니다.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嗚呼, 寡人思悼世子之子也. 정조 즉위년(1776) 3월 10일)” 조선왕조의 22대 국왕이 언터처블이나 다름없었을 사라진 그 이름을 상기했기 때문이죠. 나는 그의 핏줄이며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겠노라고. 그 핏발 서린 첫마디는 사형선고이자 전쟁선포나 다름없었습니다. 그 자리를 차지한 신하의 대부분은 왕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에 깊이 관련되어 있었으니까요. 영화 역린에서 현빈의 멋진 목소리로 시작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는 정조 암살 계획의 계기가 되는 이른바 판도라의 열쇠였던 겁니다.

 

용의 턱밑에 난 거꾸로 된 비늘을 뜻한다는 역린. 이를 건드리면 용이 크게 노하여 화를 입는다는 뜻을 왜 이 영화의 제목으로 붙였을까요. 역사가 아닌 영화의 내용만으로 미루어 짐작해볼 때 온순한 용의 심기를 건드린 이는 다름 아닌 정조의 어린 할머니, 정순왕후입니다. 마치 장미 꽃봉오리처럼 어리고 아름답지만, 치명적인 가시를 지닌 그녀는 손자를 왕으로서 대우해주지 않고 희롱하거나 위협합니다. 한마디로 왕을 귀여워하다 못해 그의 턱 아래 수염을 잡아 비틀어버린 거죠. 이 어려운 과제를 맡은 이가 바로 한지민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마치 도전과제처럼 배치된 이 캐스팅에서 분명 배우들은 온 힘을 기울여 발버둥 쳤습니다. 선입견이라는 늪을 빠져나가기 위해. 하지만 그 수심은 워낙 깊고 끈적거려서 웬만큼 대단하지 않고서야 벗어나기 어렵죠. 애석하게도 대다수의 배우는 그 선입견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단호하게는 현빈 외엔 누구도 그 틀을 깨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중에서도 한지민의 연기는 그녀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만치 심각했습니다.

 

 

 

 

 

역린을 보면서 내내 아쉬웠던 점은 캐릭터 만들기에 치중한 나머지 지나치게 작위적인 대사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특히 치명적인 요부라는 캐릭터를 위해 한지민에게 부여한 대사와 그것을 완성한 한지민의 대사 소화력은 어색함의 극치였습니다.

 

특히 한지민은 대사 하나하나에 비슷한 운율과 톤으로 일종의 패턴을 만들어 대화하는데 “사람이 잠은 자야죠?” “주상에게 변고가 생기면 내가 힘들어져요.” “다쳐요.” “어려워요.” 등 단어 중간마다 쉼표를 넣고 끊어 말하기, 느릿느릿했다가 느닷없이 다급해지는 리듬이 영화의 대사가 아닌 개그 프로의 유행어 만들기나 다름 없어 보였습니다. 그것도 개그콘서트가 아닌 웃찾사 같았죠. 길티, 길티를 되풀이하는 조재현 씨의 대사 또한. 감독이 리얼리티를 중시했다면 이런 대사와 연기를 용납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빈 또한 초반엔 선입견에 의한 어색함이 느껴졌으나 역사와 판타지를 버무려서 나온 그의 캐릭터에 점차 녹아들어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재규 감독이 그의 멋을 위해 대부분의 신을 폼 나는 장면으로 채워준 공 또한 무시하지 못하고요. 현빈이 열연한 정조는 후반부의 한 장면을 제외하곤 결코 폼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따뜻하고 감성적이지만 어린 시절부터 암살 위협을 받아온 불운의 로열패밀리인 만큼 특유의 경계심과 적 앞의 단호함 또한 배우 현빈에게 발견한 새로운 연기 영역이었죠.

 

역린을 보면서 내내 중국 영화 조조-황제의 반란이 떠올랐습니다. 어린아이들을 납치, 감금해 키드 암살단을 조작하고 잔혹한 방식으로 살육을 가르쳐 최고이자 최악의 살수로 길러내는. 이 끔찍한 무리의 칼끝이 오로지 조조 한 사람을 향하며 그 중심에는 그의 권력에 위협을 느낀 황제의 공포가 깃들어져 있음을. 왕의 노한 심기를 의미하는 역린과 황제의 반란이라는 제목 또한 상응하는 바가 있지요.

 

 

 

영화 역린은 분명 선입견의 그늘을 완전히 벗어날 만큼의 완성도를 그려내진 못했습니다만 적어도 역사의 결말 위에서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만큼은 똑똑히 전달되는 작품이었습니다. 감독은 정조의 역린이 아닌 역사에 기록되지도 못할 역린의 불씨, 왕의 목을 노리는 자의 비애와 그 마음을 얻는 키워드에 주목합니다. 불을 태우기 위해 불쏘시개처럼 던져졌다가 진화되지 못하고 불티 되어 날리는 일회성의 생명들. 하지만 이런 그들에게도 마음과 끊고 싶지 않은 관계가 있었습니다.

 

살수의 홍수와 그를 지키려는 소수의 사람들. 한번 쓰임 당했다가 버려지고야 마는 불쏘시개 같은 운명을 가진 그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가치관이나 정의, 거창한 대의명분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바로 관계의 신뢰죠. 영화 속 정조가 상책에게 한 것. 갑수가 을수에게 전한 것. 신뢰를 학습한 이는 스스로 불쏘시개가 되는 일조차 마다치 않습니다. 이게 바로 작은 일이 감동이 되고 그것이 곧 기적이 되어 전한 희생이죠.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 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영화의 거대한 메시지가 된 중용 제23장은 선입견의 장벽 위에 서 있는 감독 자신이 관객과의 관계를 돌이켜 호소하고 싶은 거대한 마음속의 울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의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자료의 저작권은 해당 제작사와 신문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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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4

  • 2014.05.12 13:01

    비밀댓글입니다

  • 안녕하세요.

    내 가는 길
    올 바라야
    뒤따르는 후손들도
    그 길을 따라 오지 않으련지

    그 가는 길 험란하나
    내 그 길을 선택 하리라
    뉘 무어라 말을 하든
    그 길이 바로
    정도(正道)라면 말이다.

    -정조와 정순왕후의 재미난 사실들....

    정조(홍재 이산)의 정은 바를 정-바른 왕이고,정순 왕후의 뜻은 곧고 순수한 왕후라는...

    즉-바른 남자(호는 홍재-널리 몸과 마음을 깨끗한 남자)와 곧은 여자의 대결...

    그리고 더 재미있는 사실은 그 이름대로 살고 죽었다는 점...

    정조는 왕의 권위(숙청,과감한 정책)보다는 성리학의 정치 사상또는
    현빈을 닮은 얼굴로 올바른 정도(正道)의 성군..그래서 正祖

    정순 왕후는 오직 대의명분에 맞는 행동.....

    영조의 뜻 - 사도세자를 추숭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당부 -‘갑신처분’

    정조의 뜻 - 정조 사후-김조순(세도정치의 원조)의 딸을 세자빈으로 간택을 들어줌- 이 일은 가문이 멸망하는 것을 알면서도 들어줌.

    -> 김조순(세도정치)일족에 의해 정순왕후세력 숙청.

    정조 사후-내노비, 시노비 66,000여명을 해방 하고, 이 공을 정조의 업적으로 돌림.

    정조 사후 대리청정를 4년만 하고 순조에게 물려줌-5년를(왕의 나이 20세까지 대리청정 가능) 더 할 수 있는데,왕의 친정 관습에 따라
    순조 나이 15세에 대리청정 거둠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 팟캐스트 참조-
    '정조실록- 높은 이상과 빼어난 자질,그러나''

    -> 더 재미있는 사실은 사도세자 추존이 정조 사후 99년 후에 장조의황제로 추존... 정말 길다.

    그냥 저의 사견으로는

    굳이 '정유역변'를 배경으로 허구의 인물과 왜곡으로 진행하고,1일을 플래시백(Flashback)으로 조잡하게

    하는 것보다...

    정유역변을 앞에 놓고,정조 2년-노비행방 추진을 전개/갈등으로'은전군(恩全君) 추대 사건'를 절정

    에...

    그리고 결말에는 정순왕후가 정조 사후 내노비/사노비를 해방 하면서...

    플래시백(Flashback)으로 정조와 독대 자리에서 정조가 중용 제23장 이야기하면....

    그 메세지가 관객들에 거대한 마음속의 울림이 되지 않을까라는....

    저는 현빈의 정조와 한지민(다음 작품은 드라마로..)은 호이지만,

    감독은 불입니다.

    이재규 감독이 드라마(더킹 투하츠)를 PPL천국(드라마 제목도 PPL)으로 만든 이 만행은 용서가 안됩니다.

    또 한지민을 이렇게 만든 만행도 용서가 안됨...

    P.S - 한지민은 정조 시대 배경으로 '역린'까지 3편이 있습니다.

    드라마 '이산'

    영화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

    정조 시대 전문 배우....










  • 2014.05.13 10:01

    비밀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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