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콜의 미소년 미소녀 탐구생활

 

 

"어젯밤에 교수님한테 전 여자였어요." 십여 년 전 드라마의 캐릭터를 보고 충격을 받은 기억이 있는데 정확히 설명하자면 캐릭터 자체는 평범했으나 그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가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서였다. 2002년 여인천하에서 수염이 나지 않은 여자 얼굴의 중국 상인 장대인이 내겐 그랬다. 남장 여자 역할이 흔치 않은 시절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런 역할을 중견 배우가 소화했다는 것이 대단히 이색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밋밋한 턱에 하얀 얼굴, 까만 눈 주변과 기괴하게 웃는 그 모습은 흥미로우면서도 한편으론 오싹하기도 했다.

 

이 작품의 영향일까. 이후부터 중견 배우 이휘향의 캐릭터를 눈여겨보게 되었는데 그녀가 맡은 캐릭터는 대체로 정상적인 인물이 없었다. 아니 때로는 캐릭터는 지극히 정상이지만 배우 자신의 감출 수 없는 암흑의 아우라가 그 캐릭터를 어둠으로 물들이기도 했었다. 빛나는 로맨스는 이런 이휘향의 진가를 그대로 활용한 드라마다. 이 드라마는 청춘남녀의 사랑으로 한정된 일일 연속극의 체계를 중견 배우 4인방을 투입, 중년 로맨스로 물들이며 일일드라마의 새로운 장을 열고 있는데 그중 악의 역할을 맡은 이휘향의 포스가 그야말로 심상치 않다.

 

 

 

일단 홈페이지에 적혀있는 그녀의 인물 소개부터가 심상치가 않았다. 김애숙, 전직 삼류 모델 출신의 일본에서 껌 좀 씹었다던 무서운 과거를 가진 언니. 그런데 더 무서운 건 이런 화려한 과거 지사와 달리 그녀의 현재 모습은 마치 사감 선생과 같아 조신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조선 시대 여인네처럼 단정하게 쪽 찐 머리와 늘 엄숙한 차림의 오피스룩. 20년 가까이 윤복심(전양자 분)의 집에서 보모이자 집사 노릇을 맡아온 그녀는 고용주의 아들 장재익(홍요섭 분)을 유혹해 안방마님 자리를 차지하겠노라는 야심을 품은 캐릭터다.

 

그녀의 과거는 드러난 것 없이 비밀로 감추어져 있어 정확한 사정을 알 수는 없지만 재익의 딸, 채리(조안 분)을 향한 비정상적인 관심을 비추어볼 때 그를 얻기 위해 고심하는 건 단순히 돈 때문이 아닌 출생의 비밀과 그 속에 감추어진 모성애라는 원동력이 아닌가 싶다. - 평소 재익의 성품으로 그녀와 외도를 했을 리는 없을 것이고 아이를 바꿔치기했을 가능성이 크다 - 여자를 강하게 키우는 건 야심도 사랑도 아닌 모성애 이상이 없다. 그래서 애숙의 구애는 절박하고 거침이 없다. 청춘남녀의 로맨스 이상으로 과격하게 돌진하는 애숙의 유혹을 보고 있노라면 섬뜩하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드라마 초반 거의 가슴이 드러나게 옷을 입어 재익의 품에 기대 그의 얼굴을 붉게 물들인 후 야심만만하게 웃으며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보니 목석은 아니었다고 쾌재를 부른다. 이후 책을 꺼내려다 실수한 척 그의 품에 안겨 야릇한 포즈로 부끄러운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 또한 일일 연속극에서 보기 드문 장면이라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세 여인의 사랑을 동시에 받는 재익은 그야말로 옴므파탈이나 다름이 없는데 그의 주위에 파리떼 - 애숙의 눈에는 - 가 꼬이자 그야말로 과격하게 그녀들을 처단해낸다.

 

대놓고 애교 기술을 선사하는 허말숙(윤미라 분)에게 일부러 커피를 쏟아 골탕을 먹이고는 티슈를 뽑아준 미안한 얼굴이 무색하게 돌아서서 비열한 웃음을 흘리는 얼굴이나 재익이 드물게 채소를 사 들고 들어오자 첫눈에 심상치 않은 기류를 감지하고는 그를 미행하여 범상치 않은 촉을 확신하기도 했다. 더군다나 재익과의 관계를 제외한 주인공의 어머니, 정순옥(이미숙 분)과 얽힌 과거 지사 또한 심상치 않다. 우연히 애숙의 모습을 발견한 순옥이 잔뜩 겁에 질려 악몽을 꾸었는데 섬뜩하게 걸어가 그녀를 위협하는 애숙의 모습은 그야말로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이나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이것 이상으로 두려웠던 것은 그녀에겐 달콤하겠지만 당하는 당사자에겐 스릴러 영화나 다름없는 김 집사의 유혹이다. 순수한 남자 재익은 첫사랑인 아내를 잊지 못하는데 오래된 사진 속 아내의 모습과 순옥의 청순미를 겹쳐보지만 비몽사몽 한 와중에 그의 눈앞에 들어온 건 낡은 사진 속 아내와 똑같은 차림을 하고 눈앞에 서 있는 김 집사였다. 사진 속 아내의 오래된 차림을 그대로 복원한 7080 스타일의 애숙이 웃음을 흘리며 서 있는데 이건 일일연속극인지 싸이코 영화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아마도 이휘향이라는 배우의 기괴함이 없었더라면 그만큼의 충격을 주지는 못 했으리라.

 

 

 

몸으로 직접 유혹을 해도 그가 관심을 두기는커녕 오히려 원수 같은 순옥에게 눈길을 주자 초조해진 애숙이 이번엔 암시 효과까지 동원하여 본격적인 유혹 계획을 세운 것이다.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김 집사를 좋아하는 마음이 꿈에 투영된 것인지를 혼란스러워하며 꿈과 현실을 헷갈리던 재익의 앞에 이번엔 파란 물방울무늬 블라우스를 입은 김 집사가 서 있었다. "오늘 만난 그녀는 파란색 물방울무늬 블라우스를 입고, 횡단보도 너머에 서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의 일기장을 들추어 알아낸 고도의 암시 효과 전략에 맥을 추지 못하는 재익은 만들어진 거짓 추억에 어찌할 바를 몰라 그녀를 차마 바로 볼 수도 없었다. 마음이 원하는 건 분명 정순옥인데 김 집사가 그의 첫사랑과 닮아가고 있는 이유는 무언가! 당황하는 그를 붙잡아 김 집사는 마치 소년처럼 순수한 재익이 빼도 박도 못할 충격적인 사실을 들려준다. 그날 밤 그가 본 여인은 환상이 아니라 살아있는 현실이었으며 사랑을 고백한 것은 물론 그녀를 가졌다는 것이다.

 

 

 

내가 그럴 리가 없다며 고개를 내젓는 재익을 그녀는 그의 양심과 감성에 호소하며 차례차례 함락시킨다. 내가 고용인이라서 무시하는 것이냐. 나는 20년 동안이나 교수님을 지켜봐 왔다. 그렇게 쌓인 신뢰가 있어 교수님의 고백을 믿고 내 모든 것을 그날 밤 내어드렸다고. "어젯밤 일은 제 인생 전부를 내어드린 거예요." 그렇다. 그녀는 20년 동안이나 재익을 지켜봐 왔기에 누구보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에 맥을 추지 못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계산된 유혹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외면할 수 없는 완전한 무기였다.

 

 

 

이런 애숙의 관능적이고 두려울 만큼의 괴기스러운 섬뜩함은 이휘향의 대담한 표현력과 농익은 연기력 위에서 빛을 발한다. 6회. 재익을 유혹하는 신에서 그녀는 작품을 위한 노출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염려하는 제작진에게 대담하게 단추를 하나 더 풀어 보이는 모습으로 망설임 없는 애숙의 성격을 표현해냈다. 중년 로맨스의 악의 축이자 악녀 장채리와 얽힌 출생의 비밀, 그리고 정순옥을 죄인으로 만드는 미스터리한 과거. 겉은 깐깐한 사감 선생 같으면서도 무궁무진한 비밀로 무장하고 있는 그녀의 숨겨진 비밀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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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8

  • 와아. 장난 아니군요. 배우 이휘향이 갖고 있는 뭔가 기괴스러움이 한 몫 하는 것 같아요. 흥미진진하네요.

  • 잘보았습니다 2014.02.21 17:54 신고

    저는 이휘향이라는 배우를 봄날이라는 드라마에 나올 때부터 알게되었는데요. 최근에 빛나는 로맨스보면서 저도 모르게 자꾸 눈이 가더라구요. 정말 섹시하셔서... 그래서 검색하다가 이 글을 보게되었어요. 덕분에 좋은 드라마 하나 더 알고갑니다. 여인천하에서 이휘향씨가 나온지 몰랐는데.. 님 덕분에 찾아보게되었어요. 이휘향씨 남장한 모습이 생각보다 너무 잘어울려서 놀랐네요ㅎ 개인적으로 제가 좋아하게될 여배우가 하나 더 생긴것같아 기분이 좋네요ㅋㅋ

    • 이휘향 씨를 좋아하는 분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저 또한 이미지에 연연하지 않고 강한 역할이라도 마다하지 않는 도전 정신이 존경스럽더군요.^^

  • 좋은 글 잘 읽었어요^^
    저 역시도 이휘향 연기력의 흡입력이
    상당하다고 느끼고 있답니다~
    드라마 전반의 분위기를 주도해가는 연기력 덕분에 주변 인물들의 연기도 덩달아 시너지를 얻고 있는 듯 한 것으로 보여요.
    얼마 전에 저도 다른 포인트에서 관련글을 작성했었더랍니다. 트랙백으로 달아두니 시간날 때 한 번 들여다봐주세용ㅎ

  • 이휘향 이 아니고 다른 배우가 한다고 하면 상상이잘안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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