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영화

더 테러 라이브, 하정우를 쓰는 감독의 자신감이란

 

 

필자의 유년 시절. 친구는 영화 스피드를 전파하며 이런 소개문을 덧붙였다. "진짜 재밌는 건 이 모든 게 하루 만에 벌어지는 일이라는 거야." 막상 영화를 보니 친구의 말 그대로 반드시 하루 안의 사건은 아니었지만, 광활한 사건을 한정된 공간에서 고립된 상태로 풀어나가는 이 영화의 전개 방식은 어렸던 내 손에 땀을 쥐게 하기 충분했었다. 영화 더 테러 라이브는 스피드가 그랬던 것처럼 테러범과 주인공의 온에어된 격전을 중계하는 영화다. 그리고 스피드가 그랬고 그 외의 영화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런 부류의 영화가 취할 수 있는 상상력을 고스란히 발휘해낸다.

 

 

 

시대를 풍미했던 국민 앵커 윤영화(하정우 분)는 좌천되다시피 맡게 된 라디오 중계석에서 한 남자와 지극히 신경질적인 통화를 나눈다. 라디오가 원하지 않는 대답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이 남자를 그는 그저 시시한 불청객이라 생각하며 쫓아내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전화는 끊기지 않고 급기야 방송 사고로까지 이어진다. "지금 한강 다리를 폭파하겠습니다." 남자의 존재가 같잖았던 윤영화는 충격적인 선전포고마저 소인배의 헛소리라 웃어넘기며 급기야 욕설을 퍼붓기까지 한다. 나를 그렇게 우습게, 만만하게 봐선 안 된다는 남자의 충고가 심상치 않게 느껴질 무렵 순간 파괴의 파동이 윤영화의 귀를 먹먹하게 한다. 남자가 예고한 그대로 한강 다리는 파괴되어 버렸던 것이다.

 

 

 

움직일 수 없는 윤영화는 앵커 자리에 고정된 채로 목을 죄는 폭발의 위협을 감당하며 테러범을 협상하는 '멋진 하루'를 보낸다. 신경질적인 테러범의 지시사항 때문에 이 영화의 주인공 윤영화는 등장한 지 몇 분도 되지 않아 발이 묶이는 최악의 핸디캡을 갖게 되고야 만다. 그것은 동시에 영화의 핸디캡으로 이어졌다. 사뭇 경이로운 것은 이 영화의 시간을 다루는 태도다. 자리를 벗어날 수 없는 주인공은 영화의 9할 이상을 방송국이라는 한정된 장소에서 교전하는데 그것마저도 몇 평 남짓하지 않은 협소한 라디오 스튜디오 안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때운다.

 

 

 

영화의 모든 배경을 고작 스튜디오 하나로 떼워버릴 만큼의 테러적인 자신감의 원천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영화가 끝나고 올라가는 오로지 하나의 특별한 이름, 하정우라는 세 글자로 설명된다. 더 테러 라이브의 홍보물을 돌이켜보자. 포스터 위에 놓인 터져버린 한강 대교와 더 테러 라이브. 그리고 하정우라는 특별한 이름. 제작진이 이 이름에 거는 자신감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증명할 수 있는 결과물이다. 이 포스터만큼이나 영화는 오로지 하정우라는 배우의 연기에 사활을 건듯한 느낌을 전해주는데 그럼에도 이를 악물고 내민 최후의 수단 같은 초조함이 아니라 제작진의 흡족한 여유가 느껴져 하정우라는 배우의 신뢰가 어느 정도인가를 짐작하게 한다.

 

 

 

그간 하정우라는 캐릭터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비린내 나는 속물 엘리트의 역겨운 디테일을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소화해내는 하정우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 같은 하정우라는 배우의 마지노선을 완벽히 무너뜨린다. 특히 심드렁한 라디오 패션을 화면용 수트 차림으로 갈아입을 때 그가 얼마나 자연스러운 흐름을 읽어나가는 배우인가를 여실히 증명해 보인다. 잘 차려입은 엘리트 안경이 무색하게 가글을 하듯 입을 헹구며 음료를 마시는 모습에 역겨움을 느끼다가도 전 아내의 행적에 가슴 설레이는 팬서비스 같은 장면도 소환되어있다. 영화 속에서 한번 마주치지도 않은 여자에게 몇십 년 치의 애착이 느껴지게 할만큼의 애정을 이 남자 참 잘도 표현해낸다.

 

 

 

영화라는 무한의 가능성 속에서 소수의 기회만을 포획해 블록버스터 같은 오락 영화를 만들어낸 감독의 기지에 박수를 보낸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그 좁은 공간 위에서 97분의 감정을 느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다. 상투적인 소재에 허무맹랑한 전개가 다수 포함되어있음에도 블랙코미디처럼 희화화된 사회의 단상은 이것을 마냥 있을 수 없는 일로 치부할 수 없게 한다. 무엇보다 명검을 얻은 플레이어의 자신감이 도대체 어느 정도인가를 확인해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다. 나의 하정우를 도저히 나쁜 놈으로 만들 수 없었어...스러운 마무리가 다소 아쉽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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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D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닥터콜 M/D

      더 테러 라이브 이전까지는 약간의 의문도 있었는데 이번 작품으로 그 생각을 날려줬네요.

  2. 와코루 M/D Reply

    조만간 더 테러 리스트 보러가기로 했는데 글 보니 더 기대가 되네요 +_+

    • 닥터콜 M/D

      영화 맛깔나게 잘 뽑았어요. 즐감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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