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 이야기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이야기

 

신의 가호는 때론 잔혹하리만큼 무계획적이다. 난파된 배의 구명보트는 항상 그렇듯 좌석 수가 제한되어 있다. 몇 사람 올라타지도 못하는 구명보트를 절망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배 위의 사람들에겐 그들이 신의 가호를 받은 행운아로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그들은 신의 가호를 받은 것일까. 문명과 룰이 개입하지 못하는 망망대해 위의 인간들. 그리고 엄습해오는 굶주림과 목마름. 순간 두 편으로 갈리는 이성과 본능의 혼란. 나는 고민한다. 내 옆의 사람을 먹을 것인가. 먹지 않을 것인가. 혹은 먹는다면 그것은 살인인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나.

 

 

 

파이의 엄마와 파이는 누구보다도 이런 난감한 상황에 놓여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세 명의 신을 믿었으며 그의 어떤 종교는 고기를 탐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파이의 어머니는 채식주의자였고 굶주리면서도 미트 소스를 먹지 못했다. 그녀와 주방장은 고기를 먹는가 먹지 않는가의 이유로 시작부터 신경전을 벌였다. 주방장은 굶으면서까지 신념을 지키는 파이와 파이의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고기 소스를 강요했고 파이의 모친은 그것을 거부했다. 역시 종교적인 이유로 고기를 먹지 못하는 불교 신자는 그들에게 다가와 다정한 목소리로 말한다. "저는 행복한 불교 신자인데 고기 소스를 먹죠. 배 안에서 이건 고기 소스가 아니에요. 양념 같은 거죠." 라고. 아버지의 동물원에서 키워져 심지어 고기조차 먹지 못하는 파이는 세 명의 신을 믿으면서도 그들의 합리적인 가호를 받지 못했다. 파이는 망망대해 위에 남겨진 브룩스였고 결국 더들리가 되었다.

 

 

 

형의 권고로 성당의 성수를 뜨러 간 파이를 향해 신부는 말한다. "너 목이 마르구나?" 그것은 곧 리차드 파커의 원래 이름인 목마름을 파이 또한 공유하고 있음을 내포하는 상징적 은유라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이는 벵골 호랑이 리차드 파커와 마음이 통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피가 흐르는 고기를 쥐고 철장 안으로 손을 내밀어 리차드 파커를 시험했다. 기겁한 아버지에게 파이는 외쳤다. 호랑이의 눈에서 교감을 느꼈다고. 하지만 아버지는 그것은 그저 호랑이의 눈에 비친 네 모습을 본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파이는 리차드 파커를 위해 미안하다고 눈물 흘리며 청새치를 죽였지만 그것을 시킨 것은 벵골 호랑이 리차드 파커가 아닌 파이의 본능 그 자신이었다. 어둠의 바다를 바라보는 리차드 파커에게 파이는 묻는다. 무엇을 보고 있니. 리차드 파커.

 

소아마비의 고통으로 신을 부르짖었던 파이의 아버지는 그의 다리를 낫게 했던 것은 양학 의사지 신이 아니었다고 단언한다. 그래서 그는 파이에게 '이성'을 지키라고 권고했다. 파이의 어머니는 파이의 아버지를 선택했다는 이유로 가족에게 버려졌다. 버려진 그녀에게 가족과 연결된 유일한 뿌리는 '믿음'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어린 날의 파이에게 입안에 우주가 들어있다던 크리슈나 신을 소개한다. 파이가 선택한 좋은 이야기는 두 번째 이야기였다. 그는 아버지가 선물한 프랑스의 가장 맑은 수영장이라던 피싱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크리슈나의 입속과 같은, 그리고 우주와 같은 무한대의 가능성을 자신에게 선물했다. 그것이 '파이'다. 그리고 파이 이야기다.

 

 

 

 

결국 확장성에 대한 이야기다. 어린 날의 파이에게 어머니가 읽어준 신 크리슈나의 입속에 담긴 우주와 같이. 아버지에게 받은, 시작과 끝이 존재하는 수영장의 이름을 버리고 스스로 선택한 무한대의 파이처럼.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전달하는 메시지는 결국 우주의 그것과도 같다. 유한하지 않은 무한대의 이야기.

 

 

 

"사실 소년에겐 빨리 어른이 되고 싶으면서도 영원히 자라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으며, 누군가 자신을 돌봐줬으면 하는 생각도 있다. 그러다가 그걸 벗어나게 되는 순간, 가슴이 아프게 된다." -이안 감독의 인터뷰 중에서

 

 

 

문득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 '가재 바위 등대'가 생각난다. 배를 탄 손님들이 돌아가며 그들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이야기의 말미에는 꼭 "이거 실화예요?" "진짜 있었던 일이에요?" 라는 질문이 따라붙었다. 그러나 어느 이야기가 끝나고 누군가는 외친다. "이 이야기는 진짜인지 가짜인지가 중요하지 않아. 이야기 자체만으로도 훌륭하니까." 라이프 오브 파이의 어느 것이 진짜인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어떤 이야기를 믿느냐에 따라 관객의 감상 또한 달라질 테니까. 그 나머지를 채우는 것은 감독도 원작 소설도 아닌 관객 자신의 믿음이다. 하지만 그것이 종교적 철학이든. 이성과 본능을 재판하는 살아남은 자의 심판이든. 인간과 동물의 상생을 담은 동화의 한 페이지든 간에. 무엇을 느끼건 그만큼의 감동을 채울 수 있는 훌륭한 이야기임에는 틀림없다. 소설 속이든 실화 속이든 리차드 파커의 영혼이 이 영화 속 리차드 파커의 선택으로 치유될 수 있었기를 바란다.

 

글의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자료의 저작권은 해당 제작사와 신문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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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위니[WINNIE] M/D Reply

    미어캣 섬이 참 인상적인 영화였습니다.
    현실과 몽상을 넘나드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요?
    한번 더 보고싶은 영화네요..

    • 닥터콜 M/D

      저는 그 살인섬에서도 미어캣이 어찌나 귀여운지.허허. 하품하는 미어캣을 보며 한마리쯤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네요. 또 보고싶어요!

  2. M/D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닥터콜 M/D

      두번째 봤는데 아이맥스로 못본게 너무 한이 됩니다.ㅠㅠ

  3. 옥수수알 M/D Reply

    정말 간결하면서 모티프랑 다 딱딱 짚어내는 완벽한 리뷰네요 이 영화 연초부터 대번에 강력한 아카데미 대상 후보에 오른... 잘 보고 갑니다

  4. 글쓰고픈샘 M/D Reply

    아직 못밨는데 돼게 좋은 영화라고 들었어요.이글 읽으니 더 보고 싶어지네요.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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